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되었던 대 부흥운동은 마침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그야말로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 이었다. 혹자는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또는 "소박한 개인적 신양" 으로의 한국교회 신앙의 형질을 결정해버린 하나의 전환기로서 그 때문에 정치적 현실적 이유로 교회를 찾았던 이들이 대거 이탈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해서 교회가 근본적으로 새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교세가 급증된 것은 이 운동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해 준다.

   1905년에는 321개처였던 교회가 1907년에는 642개처로 성장하였으며 전도소는 470개소에서 1045개소로 99,300인으로 증가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긍정적인 면을 든다면 첫째,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외었으며 둘째, 한국교인들과 선교사 서로간의 이해 증진에 기여했고 셋째, 한국교인의 도덕성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넷째, 성경공부의 기도의 열심이 더욱 고양된 것등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한국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새벽기도회가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와 한 장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지역 대부분의 초기 교회가 이때를 전후해서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1. 총회 및 노회

    1905년 을사 5조약 및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으로 국가와 사회의 여러 가지 조직이 와해되어가는 시기에 교단의 전국적인 조직이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07년 9월17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노회(소위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이 지방은 경상대리회에 소속되었으며 1912년 9월1일 총회가 조직되기 전해인 1911년 12월 6일 부산진 교회당에서 경상노회로 발전 개편되었다. 그 때 임원은 회장 왕길지, 서기겸 회계 홍승한, 회원은 선교사 15인, 목사 2인, 장로 15인이었다.

   그 후 1916년 12월27일 제 11회 경상노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모였을 때 경북, 경남노회로 분립되었다. 그리하여 겅북노회는 같은날, 같은 장소에서 선교사 6인, 목사 6인, 장로 17인을 회원으로 하여 모였는데 회장 박영조, 부회장 김영옥, 서기 김충한, 부서기 이만집, 회계 정재순 등이 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12월 20일 경안노회가 창립되기까지 줄곧 경북노회에 소속되어 오게 되었다.

 

   2. 당회 조직

   한국 장로교 최초의 당회는 1887년 9월 27일(화요일 저녁) 서울정동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14명의 교인이 모여 새문안 교회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두 사람의 장로를 장립한 것이었다.

   영남에서는 1904년 5월 27일 부산진 교회에서 심취명이 장롤로 장립하고 경북에서는 1907년 6월 2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김성호, 박덕일 두 사람이 초대장로로 장립하므로 각각 당회가 조직되었다.

   경안노회 최초이 당회는 안동교회에서 1913년 7월 20일 김병우가 장로로 장립되므로 조직되었는데 이 때 선교사 오월번과 목사 김영옥이 동사하고 있었다. 그 후 김충한이 1915년에 장립하여 비봉당히가 성립했으며 쌍계, 제오, 지보 당회들이 이어서 조직되었다.

 


   1. 국곡교회를 통한 전도

    국곡의 군수백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 믿기로 결심한 즉시 성경읽기와 기도에 전념하였으며 "야소귀신이 동리에 들어와 동리가 망하게 되었다"는 등 갖은 비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1902년에는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는이에 멎지 dskg으고 근동은 물론 북부지역을 두루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4년에는 괴산동의 김학배, 이만기, 손용진, 최달모 등이 권수백의 전도로 믿게 되어 마침내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의 박곡(朴谷)교회이다. 권수백이 박곡에 교회를 설립하기 전에 이만기(이영환 목사의 부친)등이 비봉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1906년에는 남후면 상아동의 권수필, 권봉원 등이 역시 권수백의 전도로 결신하고 국곡교회로 다니다가 그 이듬해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아곡교회의 시작이다. 1907년에는 구곡교회로 다니던 이태응, 이경백 등을 중심으로 장사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9년에는 소호리 교회가 장사리 교회에서 분립되었다.

   괴산(박곡)교히에 다니던 최달모는 자신이 사는 창길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마침 쌍계 교회의 김성실 장로가 이사오게 되어 협력 전도하여 창길교회를 세우고 예배당 3칸을 건립하였다. 쌍계에는 이미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 등이 믿고 군위군 호암교회로 다니다가 그 다음해에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예배당을 세웠더니 박영화(朴永和) 전가족이 믿고 돌아오게 되었다.

   쌍계교회에서 분립한 삼분교회는 카톨릭 신자였던 김재언이 개종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권돈표, 박영환 등이 믿고 돌아오므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1904년이었따.

  쌍계교회가 1906년을 전후해서 분립시킨 교회로는 대사. 장림, 덕봉, 하화 등이 있으며 예천상락의 양조환, 양위환 등이 믿고 다니다가 1907년에 분립하여 상락교회를 세웠다.

 

   2. 방잠교회를 중심한 교회 설립

   1906년경 김성복, 이호명을 중심으로 설립된 방잠교회는 어떤 때는 700명이 모였다고 전해질 만큼 예안일대는 물론 안동, 영주 등지에서 5~60리 길을 걸어서 모였으며 한동안 그 부흥은 대단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이후부터 방잠으로 다니던 교회들이 각기 자기들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예안일대의 "흩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방잠 동네에는 김성복, 이호명 두 집 외에는 교인이 없었으며 김성복 등도 만세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어려움이 겹쳐 나중에는 지내교회로 함하게 되었으며 1923년에는 예배당 건물까지 방매하고 말았다.

 

   1) 녹전교회
  녹래동의 이주호, 이주여, 이주사으 이주한 등이 1906년부터 방잠교회에 왕래하며 예배드리다가 1909년 9월9일 교인들의 헌금 7원 75전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오월번 목사와 김성삼 조사의 인도로 녹전교회가 창립되었으며 30척되는 장대 끝에 십자가 깃발을 달고 감격스럽게 출발하였다.       

   2) 방하교회
  1907영 최영구씨 외 8명이 방잠교회에서 분립하여 최영봉의 감나무 밑에서 처음 예배드림으로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김동원의 초가 6칸을 매입하여 현 위치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3) 안흥교회
  남수용, 우연석 등이 믿고 방잠교회에 다니며 예배드리다가 교인들이 많아지므로 1909년 10월 건물을 마련함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4) 의일교회
 
 예안의 김충서 씨가 믿고 30리 거리인 방잠교회로 다녔으며 1909us 6월 권두영이 믿고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예배드림으로 의일교회가 창립되었다.

   5) 동교교회
 
 박순기, 이동소 등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그 후 4, 5명의 교인이 생김에 5, 6개월을 방잠교회로 다니다가 1909년 10월 상순에 구룡동에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최초 교회 설립자들은 김재진, 박순기, 정야조, 김점실, 류연선, 김우현 등 10여명이었고 역시 예배당에느 stlq자가 깃발을 높이 세웠다. 1910년 3월 현위치로 옮겼다.

   6) 지내교회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베럿 선교사에게 학습을 받은 홍재삼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방잠교회가 왕성하여짐에 그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경에 다시 지내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7) 마동교회
 
 김영목이 1908년경 예수를 믿고 방잠교회로 다녔는데 그 아들 김진호와 방잠 이치운의 딸 이도금이 결혼을 하였는데 이는 초기교회의 결혼풍속의 한 모습이라 하겠다. 나중에 마동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3. 그 밖의 교회들
  
오대의 김정석은 영양군 일월면 찰당골(  )에서 대구에서 온 전도인으로부터 복음을 받고 고향 오대로 와서 1907년 백형인 김정표의 집에서 15여명이 예배드림으로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9년 4월 2일에는 김정석 외 48명 교인이ㅡ 헌금 142양으로 학당 10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봉헌하였다. 설립당시 주요 인물로는 김정표, 김정석 외에 남승하, 정성흠, 정오북(승교)등이 있다.

   한편 매정교회는 선교사 임대선의 전도로 임학수, 임경수 등이 먼저 믿고 열심히 전도하여 70여명이 회개하고 돌아옴으로 1909년 초가 4칸 집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그 후 교세가 더욱 부흥하여 예배당 8칸을 증축하기까지 하였다.

  그 외에 고창, 신평, 만촌, 온혜, 수동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서 설립된 교회들이다.

 

   4. 비봉 교회를 중심한 의성지역 교회의 발전

   처음 비봉교회가 설립되었을 때는 거의 의성군 일원에서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최초로 분립한 교회가 제오교회로서 처음에 정규호가 믿고 열심히 전도하여 10여인으로 신자가 불어남으로 1907년 제오동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느 호미동의 김기화, 김원휘, 김경찬, 김천특, 의성읍의 서우현 등이 호미동에 초가 삼칸의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렸고 그 후 1911년에 읍내 동산으로 옮겨 예배등을 건축하고 도동(道東) 교회라 칭했는데 오늘의 의성제일(의성읍)교회이다.

   그 밖에 1908년 어간에 삼산, 청로, 산운교회가, 그리고 뒤를 이어서 학미, 효선, 대리, 실업교회 등이 모두 비봉에서 분립하였다. 효선, 사곡, 석탑(광암), 구계교회들도 초기에 설립된 교회들이다.

 

    5. 영양 최초의 찰당골 교회

   1906년경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서 영양군 일월면 찰당골의 강보의 부인 전원구(田元九)여인이 예수를 빋고 그 시부와 시동생 강복원, 성원 등에게 전도하였으며 당시 80여호 되는 동네에 30~50여 명의 교인이 모일 만큼 교회가 부흥했다.

   그러나 의병(義兵)과 일병(日兵)등의 병화(兵火)로 인하여 숱한 피해를 받으면서도 견디어 나오다가 결국은 교회를 산중으로 옮겼으며 그로 인해 교회도 많이 약화되었고 동민들도 다수가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결국은 일제의 탄압과 박해를 견디지 못해 교인들이 흩어지고 낙심하는 등 어려움을 당하다가 종내에는 신자가 없게 되자 1922년경에 예배처소를 매각하였는데 당시 교회 처소는 현재 채소밭으로 남아있다.

   이 무렵에 일월면 오리교회, 수비면의 수비교회, 계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계동교회는 팔당골의 전원구 부인이 전도부인으로 강영익등과 함께 1908년 설립하였으며 당시 면정 박치화의 굉장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점접 부흥하였다.

   석보면 포산교회는 안석종(安錫鐘)이 영덕시장에 가서 전도를 받고 처남인 조병우(趙秉宇)와 함께 이상동(李相東,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의   )조사로 더불어 1909년경에 설립하였다. 이 포산교회에서 영덕 황장동의 흘무골(흘무골)교회, 원전교회 등이 분립되었다.

 

    6. 영주지방의 교회 설립

  영주의 강두수, 임재봉 등 수십명이 믿고 나서 방잠교회까지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7년경에 지고(지곡)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강후진, 강서도, 강대흥, 강노구, 강율원 등 10여명의 옹촌교인들이 처음에 지곡으로 다니다가 옹친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강신원, 강재원, 강병창 등이 믿고 처음에는 50리 방자교회와 30리 지곡교회로 다니다가 1907년 내매(내매)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영주읍의 정석용(정석용)이 믿고 내매교회로 다니다가 1910년에 예배당을 세웠으니 오늘의 영주 제일교회의 시작이다.

 

   7. 봉화지방의 교회 설립

  문촌(文村)의 장복진(張復震)이 그 아들 두문(두문)을 통해 전도를 받아 믿는 즉시 내매교회로 다니다가 1908년에 이르러 장씨 문중회의를 통해 문중의 40여명 이 집단적으로 믿기로 작정하매 조선(祖先)을 모시던 재소(齋所)를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며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교인수 100여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척곡(尺谷)교회가 문촌에서, 압동(鴨洞) 교회가 풍기 및 내매교회로부터 분립되었다.

 

   8. 예천지방의 교회 설림

   예천지방에 맨처음 설립된 교회는 괴당(槐堂)교회로서 1907년경이었다. 나만기(羅萬基)가 먼저 믿고 의성 삼분교회로 다녔는데 신자가 점점 많아지게 디자 작동(鵲洞)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가 교회가 더욱 부흥함에 과당으로 옮겼다. 교역자는 해리 선교사와 이희봉(李喜鳳)조사였다. 이어서 효갈(孝葛)교회와 신풍(新豊)교회가 각각 설립되어 예천의 처음 교회들이 되었다.

 

   9. 청송지방의 교회 설립

   화목 황재술, 김상갑 등이 주동이 되어 1904년 11월 23일 덕계동에서 시작된 화목교회는 그 후 의성군 옥산면 실업(實業) 교회의 강원백, 조치일, 영수 등이 오게 되어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화재로 예배당이 소실됨에 1918년에 현 위치에 24평의 예배등을 기공, 그 이듬해 준공하게 되어 그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한편 현서 갈천의 박영수(朴永修)는 "진리팔편"(眞理八篇)이라는 전도지와 요한복음서를 읽고 믿고저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신령 임쳥에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1908년 7월7일 주일날 임평교회에 출석하였으며 그로부터 4개월 동안 아들 마상, 봉조와 동생 재수 및 남차관 등에게 전도하여 함께 임평교회로 다니다가 그 해 11월 16일에 갈천동 박씨집에 기도처를 정하여 회집하였다.

   그 후 수락(水洛)의 김기수, 김청석, 그 김치원, 김도연 등이 결신케되어 1909년 9월 15일에는 교회를 수락으로 이전하였으며 초가삼간 예배당을 교인들의 힘으로 건축하였으니 이것이 수락교회이다.

   당시 순행 목사로는 어도만, 권찬영, 궈일두 등이었으며 박영수는 1909년에 학습, 10년에 영수, 15년에는 조사로 지방전도에 종사하다가 1921년 3월22일에 위철지 목사의 집례로 초대 장로로 장립하므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10. 영덕 지방의 교회 설립

   영덕에는 1907년 양성(洋城)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후 남정(南亭)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들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장사교회의 허 일(許逸)의 전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장사교회에 출석하다가 각각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910년 낙평(洛坪)교회에서는 일신의숙(一新義塾)을 설립하였으나 운영문제로 분규가 일어나서 최봉희가 교인과 학부형을 데리고 구세군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예배당까지 물려주고 나서 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묘곡, 화천, 송천, 흘무골, 금호 등 교회가 계속 설립되었다.

  포항노회 20년사에 의하면 1908년 권찬영 선교사의 영덕지방 순회 전도때에 영덕읍의 주재면(朱載冕) 이현철 및 권길이(權吉伊) 부인등이 먼저 믿고 이어서 강호근(姜浩根), 강보근(姜甫根)등이 믿어 강호근의 집에서 예배드렸는데 불신자들이 핍박이 매우 임하여 주재면의 집으로 예배처소를 옮겼으나 박해는 더욱 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은 나날이 불어나서 1913년에는 노회에서 "화개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15년에는 초가 12평의 예배당 건립, 1916년에는 명신(明新)학원 설립, 1921년 주재면이 장로로 장립되어 당회가 조직되니 이가 영덕지방의 모교회인 영덕읍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