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경상도, 특히 북부 그 중에도 안동지방은 소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을 만큼 장상선비는 물론 선도(仙道), 불도(佛道)에 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인재의 보고라 하였다, 명산대첩의 유명한 고찰이 대변하듯이 뿌리 깊은 불교문화와 명현거유(名賢巨儒)를 배출한 유교문호는 이 지역의 보수성을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을 비롯한 도산, 병산서원 등 수많은 서원은 그 학문성을 보여주며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에서 애국심이 잘 표출되었다,

  또한 카톨릭은 이미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피난온 신자들이 안동, 청송, 진보, 영양 등지에 숨어 살다가 1815년 을유박해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터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노회 창립 70주년을 맞는 지금에는 그 교세가 상당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초기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결과로 오늘 그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안 노회 경내에 최초로 선교사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894년으로 당시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미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목사가 시찰차 안동을 통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때 누구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누가 믿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것은 "통과"이상의 어떤 성과는 찾을 수는 없을 것같다.

 

   1. 김수영(金秀英)과 비봉교회 

   배위량 목사가 처음에는 부산, 그리고 나중에는 대구를 거점으로 경상도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할 때 비봉사람 김수영이 청도, 밀양 지방에 있으면서 당시 시장에서 노방전도 한는 것을 보고 모여든 군중 틈에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 객지에서 어느 정도 신앙의 확신을 얻은 후 사명을 갖고 고향 비봉으로 돌아왔는데 그때가 1900년 초로 추정된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열심히 전도하며 신자들의 가정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렸는데 이 김수영이 현재 경안노회(또는 북부)지역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요, 그가 설립한 비봉교회는 이 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2. 권수백(權秀伯)과 국곡교회

   배위량 목사의 후임으로 대구 선교부 책임자로 부임한 안의와 목사가 최초로 경안지역을 순행한 것이 1902년 3월이었다. 안의와 목사는 한국인 조사 김기원(일명 김재수)과 함RP 시장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팔기도 하였다.

  안의와 목사가 귀미기장에서 전도할 때 국곡사람 권수백이 쪽복음을 받아 읽던 중 감화를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진리를 더 알기 위해서 선교사의 뒤를 수소문해서 찾아간 곳이 안동군 와룡면 지내리(장수동)였다. 그는 거기서 홍재삼(洪在三)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선교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권수백은 동민들과 문중의 심한박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한 결과 믿는 사람들이 불어나게 되어 김병석, 김병일 등의 가정에서 돌아가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곡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특히 권수백은 조사로서 이 지역 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교회는 물론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고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3·1만세 사건 EO는 앞장서서 주도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후 1922년 김병일에 이어 23년에 장로로 장립하므로 국곡교회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

 

   3. 풍산(하리)교회

   풍산 교회는 국곡 권수백의 전도로 정봉모, 박경오, 강덕수, 김인수 등이 믿게 되어 김인수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上)에는 그 EO가 1902년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소위 지덕(지덕)이 강해서 못산다는 집을 사서 예배 처소를 마련했는데 지붕에는 삼대를 덮고 벽에는 진흙을 바르고 바닥에는 삼자리를 깔고 가운데는 휘장을 쳐서 남·여석을 구분했다. 그러다가 하리 1동(탑골)에 기와굴을 만들어 기와를 구워 12간 집을 세웠으며 1911년에는 김병우, 김익현, 김동규 둥 10여 명이 소산에 교회를 분립하였다.

  1920년에 정봉모, 1921년에 이원선이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당회장은 인노절 선교사였다.

 

   4. 지내의 홍재삼 및 방잠교회

   홍재삼은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믿기로 작정하고 나서는 기독교에 대한 열심히 넘쳐 도보로 대구까지 선교사를 찾아가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서적을 구해왔으며 믿는 사람이 생겨나자 자기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1903년 베럿(W.M.Barrett)목사가 부해리(H.M.Bruen)목사와 함께 홍재삼을 방문하여 그 집에 유하면서 마침 주일이 되어 그에게 함께 홍재삼을 방문하여 그 집에 유하면서 마침 주일이 되어 그에게 학습을 세웠는데 이가 안동땅 최초의 학습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후 방잠에 교회가 설립됨에 지내교인들은 방잠교회로 나가게 되었다.

   방잠(芳岑)d 교회가 세워진 것은 1095~7년 어간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성복(金聖福, 金海金   氏)이 외처에서(의성?) 예수를 믿고 방잠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8세 정도였었다. 김성복은 기골이 장대하고 구변이 좋았으며 그 일대 시장을 관리 감독하여 시장판도를 좌우하는 인물(장도감)이였다. 그는 이 지방의 터주인 양반세력에 대한 반감에서 서양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힘과 새 종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신앙을 선택했으나 일단 믿은 후에는 그 열심히 대단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김성복과 함RP 방잠교회 설립에 일익을 한 이호명(李浩明)은 대원군 때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 지방에 와서 살았던 평창 이씨의 후손으로 천주교 최초 영세자 이승훈가(家)의 후손이라 한다.

   이들 두 사람의 노력으로 삼산에서 고가(古家)를 사서 옮겨 예배당에서까지 5~60리를 걸어서 모여 들었다, 일설에는 특별집회시 700여 명이 회집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방잠교회는 이 지역교회들의 산실이요. 모체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5. 안동(法尙洞) 교회의 설립

     1) 선교사의 내안(來安)

   1894년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럄 목사가 시찰차 대구를 거쳐 안동을 지나가게 딘 것이 경안노회 지역에 산교사가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이었다. 1899년 대구에 선교부가 설치되었을 때 안동은 그 선교구역으로 소속되었다. 그리하여 1902년 3월 안의와 목사가 처음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두 번에 걸쳐 경북북부의 9개군을 순행하면서 성서를 팔기도 하고 또 장날을 이용하여 노방전도도 하였다. 이 때 국곡의 권수백, 풍산의 정봉모 등이 믿게 되어 이 지방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2년 장로교 연차 대회에서는 미국에서 방금 도착한 베럿 목사를 경안지방 14개 군의 전담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므로 1903년 봄 부루엔(傳海利) 목사와 함께 안동을 방문하게 되었으나 베럿목사는 건강상 이유로 곧 귀국하고 말았다. 이들은 두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했는데 50일 간 700리 이상을 걸었으며 복음서 1000권을 판매하는 등 그 활약이 대단하였다.

   1906년 베럿이 귀국 후 맥파랸드(E.F.McFarland, 孟義窩), 어드만(W.C.Erdman, 漁0萬)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동안 교세는 계속 신당되어 신도수가 1000여 명에까지 육박하였다.

 

      2) 안동 선교부 설치

    경안 지역은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데다가 교통마저 불편하여 경제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하였고 다른 지방에 비하여 더욱 소외되었다. 이 지역에 자동차가 왕래된 것이 1971년의 일이었고 중앙선이 개통된 것은 1941년이었으니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이 경북북부 오지에 마침내 선교부가 설치된 것은 1908년이었다.

   주한 선교부 사이의 "교계 예양" 협의에 따라 부산은 호주 선교부에 넘겨주게 되고 원주는 감리교에 넘겨주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안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미 북장로회는 서울, 부산, 원산, vudiid, 대구, 선천, 사리원, 청주, 강계 다음으로 맨 마지막에 안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보덴(Mrs.M.Borden)부인이 안동 선교부 설치를 위해 100$을 미선교부에 현금함으로서 최후 확정을 보게 된 것이다.

   최초로 안동에 상주(常駐) 선교사로 부임해 온 분이 쏘텔(C.C.Sawtell) 목사였으며 그가 안동에 온 것은 1907년이었다. 이어서 원주에서 일하던 웰번(A.G.Welbon) 목사와 프레쳐(A.G.Fletcher) 의사가 조사 김영옥(金泳玉)과 함께 1909년 2월에 안동주재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최초의 안동주재 선교사인 쏘텔 목사는 지방전도를 떠난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를 위해 대구로 옮겼으나 결국 1909년 11월 16일 별세하고 말았다.

  쏘텔의 후임으로 크로터스(J.Y.Crethers)목사가 부임하였는데 1910년 1월에 도착하여 다음해 11월에는 쏘텔부인의 여동셍 맥크륭(Ella MacClung)과 결혼하여 그가 은퇴한 1952년까지 40여년을 줄곧 안동에 있어서 흔히 "터주대감격의 선교사" 혹은 "Mr.안동"이라고까지 불려졌다.

   그 후 1913년 스미스(Walter.E.Smith) 가족과 크로터스 가족이 선교부 사택에 거주함으로 선교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 안동교회 창립

   경안지역의 선교사 처음부터 안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안동교회의 연원(淵源)은 배위량 hr사가 안동을 처음 방문했던 1894년 또은 안의와 목사가 최초로 안동을 찾았던 1902년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의하면 안의와 목사가 당시 매서(賣書, ?에는 ?라고 했음)여Esje 풍산교인 김병우(金炳宇)를 파송하여 서문외으 초가 5칸을 사들여 서원을 창립하고 교인들을 모아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가 1909년 8월 둘째 주일이었으며 이 역사적인 창립예배에 모인 교인들은 김병우 외에 강복영(姜福永), 원화순(元和順), 원홍이, 권중락(權重洛), 박끝인, 정선이(鄭善伊), 김남홍 등 7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교인 중에는 교회 창립 이전에 이미 예수를 믿었으며 각기 자기들의 마을에서 소규모의 예배를 드려왔다. "           "(上)에 의하면 강복영, 권중락, 원화순, 정선이 등은 방잠 교회에서 분립된 영주지곡(芝谷) 교회에 내왕하며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창립을 본 안동(?) 교회는 1년후에 교인이 70여명으로 불어나서 예배장소를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현 안동교회 교유관 자리에 있던 한옥집이었다.

  오월번 목사와 함께 원주에서 온 김영옥이 1911년 9월 제 5회 독노회에서 안동교회, 지곡교회, 내매교회의 협동목사로 청빙을 받았는데 이는 경북에 있어서 대구제일교회의 김천일 목사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목사의 시무였다.

  1913년 7월20일에는 김병우가 장로로 장립학 되므로 이지역 최로의 당회가 조직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순전히 교인들의 헌금으로 현재의 위치에 약600명이 모일 수 있는 예배당을 신축했다고 하니 당시 교인들의 열성과 교회의 부흥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4) 성소병원(聖蘇病院)

   "교계 예양" 에 의한 선교구역 배정에 다라 그동안 원주에서 일하던 오월번 목사와 함께 별위추 의사가 안동으로 오게 되었다.

  별 의사는 도착하자마자 선교사 주택(현 안도교회 교육관 자리)에 임시로 간이 진료소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성소병원의 시작이다.

  불행하게도 별 의사의 발병으로 장인차(W.O.Jhonson)가 임시로 그 자리를 맡았으나 장 의사 역시 3개월 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대구로 돌아가는 등 어려움이 있기는 하였으나 1년동안에 연인원 600여 명을 치료하였다.

   2대 원장에 스미스(R.K.Smith), 3대 원장에 벌코비츠(Z.Berconvitz)등이 연이어 시무하는 동안 성소병원은 이 지역 최초의 서양 의료기관으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전도에 커다란 몫을 감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