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에 태풍처럼 밀려온 분열의 배경은 대체로 이러하다.
총회 신학교 박형룡 교장의 3,000만환 유출 문제가 분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당시 박호근이란 사람을 기용하여 신학교 부지를 불하받는데 따른 활동비를 주었다가 속아 버린 상태에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과 그 반대의 주장이 대립되자 이 사회가 6~7차례나 모였지만 그 당시 박 교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은 상태라 이렇다할 결론을 얻지 못했다. 특히 정통 신학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대두되어 차일 피일 하다 보니 문제는 점차 커져사는 양상이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제기된 또 한가지는 경기노회 총대문제, 그리고 경북노회 문제가 여세를 몰았다.

   경북노회는 노회기관(계명기독대학에 관한 건)에 대한 권리 문제가 합세한 셈이다. 이당시 외국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s)의 입장이 에큐메니칼 선교관계(Ecumenicla Commission Relations)가 그러하다.

   이에 맞선 박형룡 교장을 중히 여기던 일부(NAE Group)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 신신학으로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라 비난하면서 결국은 Ecumenical 과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편으로 분열되었다. 또 에큐메니칼에서는 W.C.C 와의 관계가 깊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것이 공산권 대표를 인정함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미국연합 장로교회의 성립과 에큐메니칼 선교부의 개칭문제 등이 대두되어 연동교회에서 제44회 총회가 계속되었고 이와 때르 ㄹ같이 하여 승동교회에서도 총회가 회집되었다.
 
   이때 경안노회는 김광현 목사를 위시하여 목사 7명과 장로 7명, 선교사 2명이 연동교회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여 통합 총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도합 25노회에서 목사 70명과 장로 73명 선교사 11명이 출석한 가운데 총대 전원이 참석한 노회는 경안노회와 경동노회, 진주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 평동노회, 평북노회, 함남노회 등 8노회이며 전체 인원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
김광현 목사 회고록(집필중)에 의하면 노회 지도자의 태도가 분명한 곳은 어느 편이든 단합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곳은 분열이 심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전 총회에서 임원 불신임안에 서명한 본노회 총대는 다음과 같다.
김광현  박충락  김윤식  김진호  박중철  김성억  오승연  김재성  강경봉  이동창  장영락  이종국  김인한  주병호

   그후 연동교회에서 열린 44회 총회에 참석한 자는 김광현   김윤식  박충락  김진호  박중철  김성억  오승연  마삼락  설의돈  김대성  강경복  이동창  장영락  이종국  주병호  김인한제씨이다. 그러나 우리 노회에서도 잠잠하지는 않았다. 몇몇 목사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노회에서 수습위원을 선출하니 전권위원장에 박중처 목사와 위원에 이성찬 목사, 이홍구 장로, 최영두 장료였고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모인 노회원(극히 일부)들을 권면하기 위하여 설득에 나섰다.

  1.경안노회

   본 노회는 5월에 회집되어 여러 가지 현안을 처리하고 난 뒤 총회총대를 선정하게 되었다, 이때 뽑힌 목사는 김광현, 김윤식, 박충락, 김진호, 박중철, 김성억, 오승련 제씨이고 장로는 김대성, 강경봉, 이동창, 장영락, 이종국, 주병호, 김인한 제씨였다, 대체로 모두 무난한 사람들이 당선되었지만 그중에 몇분은 좀 염려스럽다고(김광현 목사 진술)생각했다.

   경안노회 회집 다음주에 경기노회가 총대 선정문제로 말썽이 된 것을 우리 총대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 때는 정보가 빠르지 못했기 때문에 관여치 않고 그저 총대 전원이 단합이 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경안노회의 향방이 결정될 수 있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립을 선언한 노회도 있었고 그리고 NAE측으로 지지 성명서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통합측 노선을 지킨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9월 노회시 총대 보고를 당시 박중철 목사가 하게 되었을 때 약간의 파란은 있었다. 그때 동의안과 개의안(중립을 지키자)이 한남노회 주장과 꼭 같은 것으로 이쪽 저쪽 모두 총대를 보내지 말고 중립으로 있자는 것이다. 이때 만약 표결에 붙이게 되면 어차피 양편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는 듯했다. 소수편이 지게 되면 결국 갈라지는 결과가 되므로 이것을 중요한 안건이라 설득시켜서 표결을 다음 노회까지 보류하고 평화위원회를 뽑아서 맡기로 하니 평화위원에 김진호 목사, 이성찬목사, 최영두 장로, 오승련 목사, 민병훈 목사 등 5인을 선출하여 총회의 평화를 도모하고 본노회의 안정을 가져 오도록 위임했다.

   이때 본노회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그룹이 성서신학원 교직원 중 몇 명이었으며 주로 영양군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노회는 중립을지지했던 몇몇사람까지 통합총회를  찬성하게 되어서 퍽 다행스러운 결과라 할수 있었다.

   60년 3월 임시노회 때 평화위원회 보고와 함께 통합총회 보고르 받고 이에 따른 여타의 문제는 수습위원 선정으로 종결을 보게 되었다. 이때 수습위원은 김광현, 강경봉, 박충락, 박중철, 임학수 5인이 활동한 공이 지대하나 성서신학원 교수로 일하던 오승련, 김기팔목사는 합동측 총회로 가게 되었다.

  2.교세확장

   분열의 돌풍과 함께 원치 않던 사라호 태풍으로 경안노회 일부지역에서 피해가 극심하여 가장 피해가 큰 곳이 와룡교회가 전파되는 것과 더불어 노회 전력과 의성지역까지 크고 작은 피해가 드러났으나 역경을 잘 견디어 복구를 했다.

   그중 와룡노회는 노회가 275,000환의 보조로 60년 3월 9일 준공헌당하였고, 영덕교회는 새 에배당을 짓게 되고 벌방교회, 문수교회, 미호교회, 일직교회, 장수교회 등을 위해 구제하는 아름다운 손길이 있었으며 이에 앞장선 교회가 춘양교회, 원황교회, 서부교회, 소산교회, 국곡교회, 소호리교회, 안동교회이었다.

   또 중앙시찰장 김광현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매곡교회가 예배당을 신축중이고 주하교회도 신축중이며 명잣교회도 신축중이라 복음의 확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실이다.

   특히 화회교회 류시중씨와 이송천교회가 통합측으로 완전히 돌아와서 감사했으며 그외 괴정교회는 분열되어 에배당을 수리중에 있음을 보고했다.

   제 70회 노회가 영주제일교회(1961.11.28)에서 개회되어 저녁 7시 경안노회 창립 40주년 기념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다.순서은 다음과같다.

 창립 40주년 기념 예배

 사   회 - 김성억목사
 묵   도 - 일동
 찬   송 -400장 - 일동
 기   도 - 최영두 장로
 성경봉독 - 행7:30~34 - 박중철목사
 설   교 - 40년의 광야생활 - 김진호 목사
 독   창 - 문은식목사
 약   사 - 김광현목사
 표창장증정 - 창립초대목사 강석진 씨께
 공로목사추대 - 임학수. 강석진 목사
 공로목사 추대사 - 박충락목사
 회고담 - 임학수 목사
 독   창 - 영주제일교회 교인중
 찬    송 - 1장 - 일동
 축    도 - 임학수 목사

   예천교회는 (62.2.28) 50주년 기념예배와 더불어 장로 장립식(장경용, 장기학) 이 있었으며, 노회 기관으로 모자원이 발족되어 이사장 김학준이사에 우열성, 설의돈, 임학수, 김기수, 임의봉, 김부한, 이동창 제씨가 운영의 기수를 들고 사회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여전도회(연합회장 김금선)의 보고에 의하면 대만과 태국에 성탄축하금을 보내어 해외선교에 일익을 담당하게 됨과 임하교회 개척 전도를 위해 김수만 장로(안동교회)를 파송하여 전도비일체를 부담했고, K,S,C,M(학생운동)을 운용하는 김정일 목사가 학생복음운동에 관한 중요성을 강조하거 경안노회 산하에 학생활동에 박차를 가했으며 60년대초에 신축과 더불어 개척된 교회는 주하, 금소, 명잣, 녹전, 하회, 지내, 금광, 영해, 녹전, 태화교회이니 눈부신 활동이라 여겨진다.

   노회 신하 교회가 개척됨과 동시 활기를 띠자 소속불명의 사이비에 해당하는 단체도 틈을 주지 않고 파급되기 시작했다. 이때 노회는 산하교인들에게 용문산 기도원에 가는 것을 엄히 금했으며 그에 속한 사람이나 교파가 불분명한 자르 강단에 세우지 말 것을 결의했으며 만약 교역자가 용문산에 갈 경우 노회에서 처리할 것과 교인이 갈 경우 해당교회 당회에서 처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성서 새번역이 출간되었을 때 내용 중 인자를 "사람으 ㅣ아들"이라는 것을 사지 않기로 총회에 건의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예천 성혜원(원장 서병옥)이 경안노회재단에 가입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육아원이 들어오게 되었다.

현황은 남아 82명, 여아 39명이 있으며 10여 명의 관리인이 함께 하였다.

  3. 사역자들의 유학


   1960년대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것 중 해외로 출국하여 신학을 공부하거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때 김광현 목사는 1963년 3월 미국 장로교 선교부 지원으로 성지를 돌아보고 그리고 세게교회를 시찰한 사실과 66년에 미국 연합장로회 총회장 리틀 박사 부처가 안동에 와서 안동교회에서 설교하고 세계적 복음운동의 그 기초를 다져 주었다.
 
   그 후 67년에는 미국 루이스 엔드클락대학에서 김광현 목사에게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루터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행사에 김광현 목사가 참석하여 새로운 비전을 주었다.

   1964년에는 배흥직 목사가 일본동경신학대학 유학의 장을 열어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였고 일본기독교 학교를 시찰하여 그 안목을 넓혔으며 이어서 김기수 목사도 역시 3년간 (67-69)동경신학 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그후 70년대에는 미국 메코믹 신학대학원을 수료, 미국 노드 케로라이나 기독교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교회에서 자유 중국의 우일중 목사를 강사로 집회하여 안동시 내 전역에 성도들이 3일간 은혜를 받음과 동시 아시아권 교류가 시작되어 80년대에는 선교사 파송의 계기가 되었다. 또 김윤식 목사도 66년 일본 동경대학에서 2년동안 공부하게 되었고 그 후 70년에는 미국 피츠버그 신학교에서 다년간 신학을 닦았으며 그 외에도 경안학원에 김인한 교장(장로)도 일본 미국 등지를 다닌바 있다.

   4. 연합회 활동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교회 개체가 운영하던 조직들이 노회 연합회로 합하여 선교활동의 기틀을 잡아왔다. 먼저 경안노회 장년 연합회가 그 조직을 활성화 하여 다져나가는 일면을 볼 수 있다.

   회장에 이언복, 부회장에 이근영 강상구 김매영 서기에 김광탁, 부서기에 남성화, 회계에 강오전, 부회계에 이은석, 총무에 조문기, 전도위원장 박정우, 교육위원장에 이준복, 제정위원장에 박희숙, 농촌위원장에 천명칠, 운영위원장에 강병도, 국제위원장에 김형철이며 실행위원에 김인한 권영무 이근영 박병수 박대인 김요헌 황병원 강신학 권태형 우덕석 제씨가 일하게 되었다.

   또 경안노회 주일학교 연합회는 회장 이종국, 부회장에 이동창 김요헌, 총무 배흥직, 서기 김광탁, 부서기 김영석, 회계에 이준복, 부회계 이은석, 협동총무에 조문기 최영두이다.

   그 외에 대한에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 경안 학우회가 조직되어 회장 장성덕 씨가 본노회 출신 신학색 17명이 있다고 보고하고 그 중에 학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게 구호르 요청하는 일이 있어서 노회에서 세 학생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도록 허락하였다.

   제 71회 노회에서 노회조직 자체가 부서별 보고 및 시찰별 보고가 활성화되어 전도부 박충락 복사는 지방 부흥회 결과를 세세하게  보고하였다. 이것을 보면 집회한 교회가 56개처 강사가 56명 집회 연인서편시찰장 김윤식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고항교회가 중립에서 통합측으로 완전히 복귀한 사실과 성소병원에서 도양교회를 신축하는 일이 있었으며 잔잔한 파도라고 볼 수 있는 무릉 기도원 토지사건은 법에 호소하지 않고 해결을 해 줄 것을 건의했다. 이때 노회에서 총회에 새로운 헌의안으로 세례교인 2,000명 미만인 노회는 페합키로 세례교인 2,000명 단위로 총회 총대를 목사, 장로 각 1인씩 파송키로 헌의한 것은 총대의 과다수로 인한 수용 및 기타 어려운 점을 막자는 의도인 것이다. 이 당시 정부에서 주일날 행사하는 것을 금하도록 헌의 했으며 경안노회 지역 각 관공서에 협조 요청을 취하도록 했다.
복음이 들어온 지 60녀 년밖에 안되지만 안동교회에서는 우연석장로 시무 42주년 신제국 장로 2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린 것은 퍽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동부교회에서 배영찬 장로 시무 40주년 기념 예배와  풍산교회 최병창 장로 시무 30주년 기념 예배도 퍽 감격스런 행사였다.

   중립을 지켜오던 부석교회가 복귀하였고 호갈교회가 승동측에서 복귀하여 온 노회가 감사했다.
여전도회 연합회 회장 김금선 씨는 김수만(안동교회)장로를 길안면 송사동에 개척 전도를 하게 하였다.
 
   또 대만, 태국 선교사에게 성탄 축하금과 타자기 1대를 보조했다. 67년에 신촌에 개척교회를 시작하여 진보에 진성중학교 안태석 장로의 협조로 선교관 건립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