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2년
화란 사람 벨트브레(J.J.Weltevree)가 일본으로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다른 두 친구와 함께 물을 얻기
위해 경주에 상륙하였다가 붙잡혔는데 이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1653년에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Hendrick Hamel)일행도
역시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그는 1668년 7월 20알 화란의
암스텔담에 도착한 후 「표류기」와 「왕국기행문」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역사상 유럽에 최초로 한국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1816년에는
영국의 견중(遣中) 사절 아머스트(Amherst)경을 호위하고
중국에 왔다가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의 임무를 띠고
내항 하였던 영국 군함 알세스트(Alceste)호의 함장 막스웰(M.Maxwell)대령과
리라(Lyra)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 등이 비인
만 앞에 정박했을 때 문정을 위하여 배에 올라 갔던 마량진
첨사 조대복(趙大福)에게 서서를 전해 주었는데 이것이
성서의 한국 전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하멜「표류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일로서
1832년 서해안을 방문한 화란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꾸즐라프(Karl
F.A.Gutzllaff)는 한국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선교사로서
한문 성서를 대량으로 전파한 최초의 전도자이며 한글 성서(주기도문)
번역을 처음으로 시도하여 「한국의 위클리프」라 일컫기도
한다.

1.
중국을 통한 선교
이
당시 유럽과 미주(美洲)에서 고조된 선교 열기는 극동의
은둔국인 한국을 향하여 도처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꾸즐라프 등의 탐방이 성과없이 끝났으나 그 후 33년만에
영국이 용감한 사람에 의하여 이 침묵은 깨뜨려지고 말았다.
그가 바로 영국 회중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후원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온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였다.
1862년
12월에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목사는 1865년에 지푸항으로
갔었는데 그 곳의 스코틀랜드 성서교회 중국주제 책임자였던
월리암슨(Alexander Willamson)의 집에서 두 명의 한국
선교의 뜻을 품고 월리암슨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를 타고 "중국 성경을
많이 가지고" 1866년 8월 9일 한국을 향해 떠났다.
한 일 주일 후에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상류인 평양쪽으로 거슬로 올라갔다.
통상과
선교를 요구하면서 접근해 오는 무장한 이양선(異樣船)에
대한 공포와 적의를 느낀 한국의 관민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비로 불어났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면서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의 약각도(羊角島) 모래톱에 좌초하고 말았다. 한국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화공(火攻)을 전개하였으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애걸했으나 분격한 군민(軍民)들은
그들을 결박하고 타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이리하여
토마스 목사는 188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에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나 나중에 마펫 선교사가 학습 교인반을
조직할 때(1893.11) 그 가운데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서서를 받았던 사람을 발견했다고 했으니 과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2. 만주를 통한 선교
1872년
10월 만주선교에 착수한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매킨 타이어(John MacIntyre)는 윌리암슨을
통하여 그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토스 목사는 한국으로 오는 길을 찾고 특히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생"을
찾기 위해서 두차례에 걸쳐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는데
두 번째인 1876년 4월에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났다.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 「조선어 교제」를 서술하고 다음으로
본격적인 성경번역에 착수 하였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백홍준(白鴻俊),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등은 1879년 이전에 각각
매킨타이어 목사와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어 맨 처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말로 최초로 번역된 성격이
1882년에 나온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전서」였다. 그 후
계속해서 단편으로 출간되다가 신약 27권이 완전히 번역되어
「예수 셩교 전서」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것이 1887년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로스역"이라 일컫는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 성경이다.
이와
같이 한글 성서가 간행되면서부터 로스 목사는 우선 성서
반포가 자유로운 만주의 한인촌을 대상으로 하여 김청송을
권서 겸 전도사로 파송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한인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국내에서는
1879년부터 백홍준의 전도로 구도자가 생겼으며 1882년
이후 누가 , 요한 복음이 간행되자 폐지(廢紙)속에 미제본된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 하였다. 그 후 1882년 10월에는
서상륜(徐相崙)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 (또는
매서)로 파송을 받아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이 무렵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였는데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로 예배 처소까지 마련했으니 이것이 국내 최초의 "의주
신앙 공동체"이다.
평양과
서울에도 1883년에 이미 복음서가 반포되었으며 형 서상륜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예수 믿기로 작정한
서경조(徐景祚)는 황해도 소래로 돌아와 열심히 전도하여
1885년까지는 최소한 20여명의 세례지원자를 내었으며 1886년에는
예배 처소까지 마련하여 매주일 예배를 드렸으니 이것이
한국교회의 요람이라 일컫는 「소래신앙공동체」이다.
3. 일본을 위한 선교
1881년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 루미스(Henry Loomis)목사가 두
번째 일본에 올 때 주 일본 미국 성서공회 총무가 되었으며
1882년부터는 한국 주재 총무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쪽을 통한 선교를 위해서 그 기지가 마련된 셈이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그 때문에 그 해
9월에 이수정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게
되어는데 그 때 그는 이미 1년전에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친구 안종수(安宗洙)로부터 들은 바 있는 기독교인
농학자 쯔다센을 마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한문으로
된 신약 성경을 받아서 읽으면서 기독교에 접근해 갔다.
일본에
간 지 3개월 후인 12월 25일에는 축지교회(築地敎會)의
성탄 축하 예배에 참여하여 큰 감명을 받고 다음해 4월
29일에는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5월
8일부터는 도쿄에서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이수정은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신앙고백문은 문서로 남아있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높이 평가 받는다.
이즈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의
재능과 그가 세례까지 받은 독실한 신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츶아가서 한국말 성서번역을 권했다.
이수정은
이 제안을 받고나서 다른 모든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성서번역에만
몰두하여 처음에는 한자에 토를 단 「현토한한 신약전서」를
1883년에 완역, 1884년에 출판하였으며 곧이어 한글 성서
번역에 들어가서 1884년 4월10일경「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라는 이름으로 마가복음이 완역되어 그 이듬해 3월에
6,000부를 간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맨 처음 공식으로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에 상륙할 때 그들의 손에 이수정의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그
외에도 이수정을 중심으로 도쿄에 처음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그는 또 미국을
향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여"한국의
마케도니야인의 부름" 이라고 일컫기까지 되었다.
4. 미국을 통한 선교
1)
감리교 매클레어 목사 최초 방한
1882년
5월22일 한미 수호 통상조약 체결과 함께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한 푸트(L.H.Foote)가 고종에게 한국의 친선 사절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1883년 7월 16일 민영익, 홍역식,
서광범, 유길준, 변 수, 고영철, 한광철, 최도민 등이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 2일에 샌프라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이 시카코로 가는 차중에서 미감리교회의 가우쳐(J.F.Goucther)
목사를 만나게 디어 3일간을 교제하는 가운데 가우쳐는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월리(Wiley)
감독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편지와 함께 선교비의
일부로 2,000 불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느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던 감리교의 매클레이(R.S.Maclay)목사에게
한국에 가서 선교사업 개시의 타당성 여부를 탐사해 보도록
요청하는편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매클레이 목사 부부는
1884년 6월19일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떠나 6월 24일 아침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매클레이
목사는 당시 승정원 승지로서 외위문(外衛門)교섭사무를
보고 있던 김옥(金玉均)을 방문하여 한국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임금께 상주하는 서함을 맡겼으며 2차 방문때 "병원과
학교 사업"을 허락하셨다는 듯을 전달받았다. 이 때문에
매클레이를 "한국 산교의 양부"로까지 추앙하게
되었다.
2) 알렌 의사의 입국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가 내외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 서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것은 1884년 여름이었고 사업비로 약 5,000불을
책정하였다. 이 때 중국 선교 의사로 임명받아 상해, 남경
등지에서 선교지 물색을 위해 고민하던 알렌(Horace. N.
Allen)에게 상해에 있던 그의 친구 헨더슨(Henderson)이
주한 미국 공사관에 청하여 공사관 공의로 채용 - 조선에서
선교사임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토록하여
선교 본부로부터 한국 주재 의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 22일에 서울에
들어왔으니 이가 한국에 공식적으로는 맨 처음 온 선교사이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하여 본격적으로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알렌의
입국 후 12월 4일 국내에서는 갑신정변이 발발하였고 그
때 수구파의 거두요 민비의 사촌인 민영익이 부상을 당했는데
알렌이 서양의술로 완케시켰으며 조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고종의 시의까지 되었으며 1885년 2월 25일에는,
광혜원이라는 왕립 체제의 병원을
설립하므로 본격적인 의료선교에 착수하게 되었다.
3)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입국
1884년
7월 24일 미 북장로교 선교 본부는 언더우드(Horace.G.Underwood)를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고 1885년 1월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장로교 선배 선교사인
햅번(J.C.Hepburn)박사로부터 선교사업의 훈련을 받으면서
한국인 신자인 이수정에게 한국말을 배웠다.
그러다가
알렌이 세운 병원에서 교수할 수 있는 전망이 보이자 1885년
3월 31일 감리교의 아펜셀라(Henry.G.Appenzeller)와 함께
일본의 나가사키를 떠나 4월 2일에 부산에 잠시 정박했다가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는데 그 날이 마침
부활절이었다. 그들은 도착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부활 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도착 즉시 알렌의 광혜원에서 일하며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곧 거리나 골목 혹은 시골에 나가서 한국인과 대화하며
전도를 하였다. 1886년 7월11일에는 헤론 의사의 한국어
교사였던 노춘경(盧春京)에게 세례를 주어 한국 안에서
최초로 세례 교인이 되게 했는데 이 노춘경은 로스가 번역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1887년
봄에는 소래의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등 세 청년이 의주
전도사 백홍준과 함께 언더우드를 찾아와 세례를 받기를
원하므로 시취하여 세례를 베풀어었다.
1887년
9월 27일에는 14명의 신자가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
모여 장로 두 사람을 선정하여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한국 장로교의 모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시작이다. 그런데 장로로 선출된 두 사람은 "봉천에서
온 사람" 의 사촌들이었고 그 밖의 사람들도 "봉천
전도인"이 전도를 통해서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며
이 창설예배에 로스 목사가 참석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1879년 만주에서 형성된 신앙 공종체가 서울의 처음
조직 교회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문안 교회의 약사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본
새문안 교회는 장로교 본산지인 스코들랜드 장로교의 전통적
장로교 성격과 복음주의적인 미국 장로교와 최초의 세례자이자
한국말 성서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서상륜)에 의해 창립된
남다른 역사성을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