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주기철,
손양원 같은 휼륭한 주의 종들이 있었다. 이런 주의 종들의
순교의 터 위에 한국교회는 성장해 온 것이다. 이처럼
70주년을 맞이한 경안노회가 조용히 지역 복음화를 이루어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속에서 직무를 다한 주의 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에서는 1980년에서 현재까지 소천했거나
은퇴한 일꾼들을 상고해 본다.

1.
김진호 목사
김진호
목사는 1898년 3월 7일생으로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교회에
다니었고 한동안 안동 선교부에서 여선교사 매킨지와
한선이 씨의 어학선생도 했다. 28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31세에 경안노회에서 목사로 임직했다. 안수후
노회 교육부 총무, 도리원 교회, 삼분교회, 영주제일교회에서
시무했고 1946년 1월 일제시 합병되었던 동부교회가 안동교회에서
분립되면서 부임해서 평생을 동부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66년
맏아들 상한 목사가 대를 이러 동부교회를 담임하면서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경안신학원을 창설하여 많은 고아들을 양육했고
경안고, 계명대,서울여대 설립이사와 노회 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 6월 이런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다. 1980년 10월 2일 소천하니 당시 노회장 강경봉
장로를 위원장으로 10월 6일 와룡앞산에 안장했다.
2.박충락 목사
박충락
목사는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당시 진보군 동면)에서 1899년
11월 28일에 출생하여 17세까지 부조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19년 2월 고종의 국장이 있었는데 이를 보로 서울에 가서
있는 동안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들어보고 알아보니 독립운동의
중심은 기독교와 천도교요, 나라가 독립하려면 예수를 믿고
미국의 힘을 입어야된다고 생각해서 예수 믿기로 결심하고
귀향했다. 결혼하고 분가 후 이정호라는 친구의 권유로
잠시 태을도를 했으나 사교임을 알고 적극적으로 예수 믿고
세례를 받고 경안성경학교를 거쳐 1946년 47세시에 장신대에
입학해서 48년 1회로 졸업했다. 실은 보다 일찍 1940년
영주에서 용산, 박산, 신암 3개 교회를 보며 신학을 하려다가
일인교수가 온다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영주제일교회로 옮겨
시무 중 9월 20일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되어 3개월 복역
후 1942년 만주로 가서 간도성에서 재피구, 십리평교회
등을 시무하다가 해방후 귀국했다.
박충락
목사의 이런 애국반일 사상은 9세시에 의병 신돌석 대장이
3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며 자기 집에 머무는 것을 본
일과 또 고종의 인산 구경시 상경해서 삭발을 거부하고
군수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 관계로 구속된 외숙을 면회한
일들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다.
1948년
11월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후 가구 국곡 춘양교회
등을 시무하며 예배당을 세웠다. 1956년 성경학교 교수일을
하며 풍산, 옹천, 지곡교회를 목회했고 8년간 교도소선교에
힘썼으며 1962년 도원 교회에 부임해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1968년 은퇴해서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이외에
장신대 감사, 계명대 창설이사, 총회전도부장, 경안노회장을
역임했고 포항북부교회등 45개처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다.
1987년 4월 9일 소천하니 당시 노회장 박종석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4월 11일 명동앞산에 안장했다.
3.윤달부 목사
윤달부
목사는 1918년 9월 13일생으로 영일군 연일면에서 연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중명교회에서 라이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1948년 전주고등성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51년
3월 경주성경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12월 경동노회에서
전도사 고시, 1954년 장신대 입학, 1957년 9월 장로회신학교(장신대
전신)를 졸업하고, 1958년 경동노회에서 목사로 임직했다.
목회
경력으로는 해방후 좌익들이 준동하는 가운데서 연일만
대잠에서 효자교회를 개척했고 신학교 재학중 파주군 임진면에서
50평 적벽돌로 문산교회 신축하였으면 1957년 3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한 후 월성군 서면에서 인화교회 49평을 신축했다.
그후 경중노회 비봉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65년
봉화 춘양교회로, 1971년 봉화중앙교회로 부임하여 연 158평의
콘크리트 예배당을 건축하며 소천시까지 시무했다. 이런
바쁜 목회중에서 경중노회장 연임 경안노회장, 경안학원·경안노회
유지재단 경안성서신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1983년
2월2일 아깝게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부인 안금선 씨와 함께
소천하여 당시 노회장 조석규 목사를 위원장으로 2월 4일
용상동 갈멜산기도원 묘지에 안장했다.
4. 조제봉 목사
1920년
10월 23일 안동군 소산동에서 출생한 조제봉 목사는 1957년
장신대를 졸업하고 1965년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회경력으로는 전도사로서 예천, 백송, 풍기 창락교뢰를
시무했고 봉화적덕교회 시무중 목사 안수를 받고 삼분동부
탑리제일 예안교회를 거쳐 길안교회를 시무했고 그리고
적덕교회에서부터는 시무처마다 예배당을 건축했다.
1973년
제 93,94회 노회장을 역임했고 1985년 길안교회 시무중
신경성 신부전증으로 소천하니 노회는 당시 노회장 진정수
목사를 위원장으로 3월 16일 출생지 소산에 안장했다.
5. 그외 소천한 목사
1980년
9월 제 108회 노회에서 원림교회를 시무하던중 소천한 고
서재현 목사 가족을 위해 헌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복동교회를
시무하던 정기범 목사가 1987년 7월 2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6. 이덕조 장로
장로로소
노회부회장을 역임하고 소천한 이로는 학미제일교회 이덕조
장로가 있다. 이 장로는 1910년 8월 24일생으로 모태신앙이었고
계성학교에서 수학한후 계속 학미동에 살면서 교회를 진실히
섬기었다.1966년 2월 25일 장로로 임직하여 1981년에 은퇴하였으며
1978년 제 103,104회 노회 부회장과 경안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1989년 9월 6일 소천하여 교회장으로 금성면 금성산에 안장했다.

1.
안동교회 김광현 목사
경안노회
70년사에서 김광현 목사는 가히 핵심적인 인물이다. 일제
말기인 1943년 1월에 30세의 청년으로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1979년 12월30일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으면서 은퇴하기까지
37년 동안 사역한 세월이 그러하고 또 개교회적이기보다는
지역적이고 노회적으로 지도한 일들이 그러하다. 김광현
목사에 관한 일은 안동교회 80년사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요점만을 기록한다.
1) 교회 행정의 지도자
1913년
9월22일 경북 의성에서 김형동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일찍이 일본 관서지방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던중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귀국해서 숭실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한 김광현 목사는 어려운
때의 교회의 지도자로소 지식과 지혜를 겸비했다. 이는
안동교회에 부임해서 세워나간 교회 행정이 모든 교회의
지침이 된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오후
2시 예배를 오전11로 당기었다. 연중 봄 여름에 행하던
세례식을 성탄절과 부활절에 행했고 유아세례는 성탄절과
어린이 주일에 베풀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모이던 제직회와 당회를 당회는 월말주일, 제직회는 첫째주일
정례화 했다. 이?? 일련의 일들을 지금까지 거의 모든 교회가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2) 지역교회의 지도자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만을 자기의 목회지로 생각지를 않고 안동과
경안노회 전역을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교회 개척 상황을 살펴보면 명백해진다.
1491년
1월에 왜정의 심한 교회 탄압정책으로 교회의 통폐합이
이루어져서 동부교회(당시는 신세교회)와 서부교회(당시는
안기교회)가 안동교회와 합병되었다. 합병당시 두 교회의
예배당은 매각해서 일본신사 수리비와 국방헌금으로 거의
쓰여졌고 일부는 안동교회로 가져왔다. 해방이 되자 1946년
1월 첫주일에 안동 신사 부속건물인 신관으로 동부교회가
분립했다.
당시
교인은 청장년이 30여 명 유년이 20여 명이었고 그해 5월
노회에서 『동부교회』하는 이름과 당회조직 허락을 받아
당회장은 김진호 목사, 장로엔 배영찬 배영문 씨로 교회의
성장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배영찬 장로는 1923년
2월에 안동교회 장로로 임직하여 시무해오던 이였고 배영문
장로는 1935년에 신세교회 장로로 임직했다가 1942년 안동교회의
시무장로로 위임했던 분이니 이는 동부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원한 김 목사의 배려였다고 한다. 이어서 1941년에 합병되었던
서부교회(당시는 안기교회)를 재건하는 데도 그 형편을
따라 도와 주어서 이원영 목사를 당회장으로 시작해서 오늘
의 서부교회로까지 발전하는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1950년
6월11일 대지 70평에 함석집 6간을 매입하여 도원교회(당시는
태화교회)를 분립시켜 3년후인 53년 5월에는 당회조직을
허락받게 되었다. 이외에도 길안 임하 와룡지방에 전도자를
파송해서 교회를 개척하는데 힘을썼고 6·25 이후 안동감리교회가
설립되는데도 남다른 관심으로 도왔다. 이렇게 김 목사는
마음으로 내 교회 내 교파에만 매이지 않고 개방적이어서
성결교회, 구세군교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일조하였다. 이런
김 목사의 지도가 있어서 안동지방에서는 교파분열은 타지방에
비해 미미했고 교파를 초월한 연합모임은 순조로웠으니
이런때에 축도같은 순서를 타교파나 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양하였다.
3)
교계의 지도자
김광현
목사는 해방이후 남조선과도입법위원 90명 중 민선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나 곧 본래의 사명인 목회사역으로
돌아왔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하고 교회의 일에만 전념해서 우리 교단의 좋은
지도자가 되었다.
노회적으로는
6·25동란중에 맡은 것을 비롯해서 다년간 노회장을 역임했고
경안학원과 성소병원 그리고 노회내 여러 기관들을 설립
운영함에 산파역에서 양육자의 역할을 직간접으로 감당하였고
1959년 9월 대전 총회에서 서기 겸 총무로 피선되어 총회를
위해 일하다가 1965년 9월에 총회 부회장으로 1966년 9월
제5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총회를 위해서
또는 각 기관을 위해서 크게 봉사하였으니 동산병원, 숭실대,
연대 이사와 성서신학원, 성소병원, 장신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찬송가 개편위원 협동사업부 부장, 총회 100주년 기념사업계획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3년과 1967년에 총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지와 구미여행을 하고 세계교회를 시찰했다. 이런 김광현
목사의 사역으로 경안노회는 더욱 굳건히 성장해 왔다.
2.서부교회 김원진 목사
노회가
70주년을 맞이한 1991년 교회에서는 원로목사로 노회에서는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은 김원진 목사는 1924년 12월 7일생이며
모태신앙으로 출발해서 1942년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1946년 경안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서 중단한 후 1948년
9월에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에 진학했다가 6·25동란으로
중단한후 1956년에 장신대를 졸업하여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았다.
목회경력을
보면 무릉교회 2년 국곡교회 3년 서부교회 30년이다. 성경학교에서
이원영 복사에게서 배우고 이원영 복사가 재건한 서부교회를
일평생 목회했으니 이원영 목사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교회이외에
제84, 85회기 동안 노회장을 역임했고 노회 유지재단, 영남신학교,
경안학원 이사를 다년간 역임했으며 현재도 1965년부터
시작한 경목을 비롯해서 안동 생명의전화 훈련원장 안동기독교윤리실천
실행위원, 안동성서 유니온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1989년부터 총회 전도부 산하 농아인선교후원회장을
연임하면서 장애인 선교후원을 위해 전국교회들을 순방하며
후원회원확보와 후원사업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주후원회도 조직했다.
3.
갈멜산기도원 박승팔 목사
1922년
7월 29일 영풍군 문수면에서 출생한 박승팔 목사는 부친으로부터
신앙을 지도받고 부친이 세운 사립 영문서숙과 감천, 용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경안고등성경학교에 입학, 졸업해인 1948년
9월 장신대로 진학해서 1953년에 졸업한 후 명지대에서
국문학을 수학했다.
1953년
11월 경안노회에서 장수 교회 청빙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풍기동부와 춘양교회를 위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여 시무하다가
1965년 3월 경안고등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1974년 1월
경안여중 교장에 취임하여 1985년까지 11년 재임하면서
현재의 교사를 신축하였고 1985년 9월 경고 교장으로 부임해서
1987년 8월 정년퇴직 했다. 1964년에 경안노회장, 영주동산학원,
영무학원, 풍기학원, 경안학원,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와
경북재단연합회 이사를 역임했고 1990년 3월부터 현재까지
경안학원 이사장으로 있다.
사회적으로는
안동YMCA이사장, 안동중앙라이온스 회장, 라이온스 209
D지구 4지역 부총재, 안동시 자문의원을 역임했으며 문교부장관과
라이온스 총재 표창, 사학재단연합회 공료상을 수상했고
1987년 12월 사학육성 공로로 봉황상을 수상했다.
교장
정년퇴임후 오늘까지 갈멜산 기도원장에 취임하여 영육의
병든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자로 여생을 마무리하고
있다.

1.은퇴한
장로 명부
은퇴년 |
이름 |
교회 |
생일 |
임직 |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
원용선
이덕조
이현발
김대균
권용암
정의섭
김성진
김응출
배홍직
권달수
설인철
김종진
유돌암
구경모
천성훈
박진덕
김석진
김성일
오재수
남점수
우덕출
김영동
박용만
이동창
박도선
권상국
김인동
이병우
신현록
신종식
박재귀
강주원
김성래
권용수
김옥선
신상호
황신호
김신용
김우학
황찬일
최동구
윤영만
서병권
권영목
송정식
박차숙
임영우
박규삼
설영곤
배삼직
최귀출
권태복
최규복
구본일
이진복
황병원
김기한
강원약 |
의성일
학미일
석보
예안
일직
풍산
안동
삼분동
동부
진보일
비봉
모산
일직
비봉
성광
삼산
이하
안흥
의성일
원림
안흥
임동
동부
서부
화목
도동
사곡
온혜
매정
예안
동교
안동
동교
구계
서부
구천
안동
동부
동부
무릉
두산
영가
안동
매정
이천
삼산
신기
송현
탑리제일
동부
풍산
아곡
무릉
의성제일
소산
동부
의성제일
옹천
|
1910.12.6
1910.5.24
1910.6.16
1910.11.12
1911.7.1.
1911.11.3.
1911.12.15
1912.1.10
1912.1.23
1912.7.22
1912.8.14
1912.10.20
1913.10.30
1919.6.23
1912.3.13
1912.7.20
1914.2.4
1914.3.10.
1914.6.20
1914.10.29
1915.5.19
1915.6.5
1915.6.26
1915.8.15
1915.12.30
1915.6.1
1916.1.20
1916.2.21
1916.3.18
1916.4.26
1916.11.1
1917.3.31
1917.5.23
1917.8.28
1918.1.22
1918.1.22
1918.2.7
1918.3.10
1918.4.27
1918.5.11
1918.7.9
118.12.7
1918.1.30
1919.2.28
1919.5.14
1920.1.10
1922.2.20
1919.11.21
1919.6.9
1920.1.9
1920.2.13
1920.2.19
1920.2.24
1920.11.4
1923.4.2
1922.2.12 |
1950.2.1
1967.11.11
1971.5.30
1952.1.24
1958.3.17
1964.5.16
1967.11.14
1969.5.1
1980.1.13
1980.10.26
1952.2.3
1968.2.15
1971.5.7
1972.2.29
1955.5
1983.3.23
1965.11.19
1960.8.26
1969.7.20
1974.3.29
1966.4.29
1980.11
1972.12.29
1968.12.29
1985.10.3
1965.12.25
1960.11.12
1984.4.5
1982.4.5
1979.5.13
1966.11.19
1977.6.3
1980.4.1
1963.8.30
1975.5
1983.4.5
1982.11.14
1970.4.26
1968.11.15
1975.4.15
1962.5.31
1964.11.13
1966.12.10
1969.5.1
1967.12.15
|
이렇게
은퇴한 장로를 모두가 노회 발전에 공이 있지만 노회장을
역임하고 생존한 분들만 여기에서 일별해 본다.
2.비봉교회 원로장로 구경모
구경모
장로는 1913년 10월 3일생으로 의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1월 24일 섬겨오던 비봉교회 장로로 임직하여 1974년
제 95회, 96회 노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83년에 은퇴하니
교회는 1984년 원로장로로 추대하여 오늘까지 교회를 섬기고
있다.
3.서부교회 원로장로 이동창
1915년
6월 5일생인 이동창 장로는 이원영 목사의 조카이며 이원세
장로의 장남으로 1952년 5월에 장로로 임직하여 원로장로로
추대받기까지 34년을 시무했다. 1923년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안동성소병원 대구동산병원 대구 도립병원
경북보건과 병리검사실 세균검사실에서 근무하다가 1947년
안동시 광석동에 약방을 개업했다.
노회안에서
규칙부장과 회계, 경안학원 감사 경안모자원 이사 성소병원
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71년 11월 제 90회에 부회장으로
피선이 되었다. 이외에도 안동시온신협 이사장, YMCA 안동부이사장,
한국국제기드온 안동캠프회장을 역임하고 경안노회에서
1986년 9월 10일 공로패를 받았다.
4.동부교회 원로장로 황병원
1920년
11월 4일 예천 출생인 황병원 장로는 예천공립보통학교와
대구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본래
불신자였으나 장로의 장녀와 결혼케 하시고 6·25전쟁중
폐결핵이란 질고로 고난을 주신 주님의 섭리로 입신하여
1951년 부할주일에 김광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후
동부교회로 이적해서 1966년 12월 10일 장로로 임직하여
1991년 원로장로로 추대받기까지 25년을 시무했다.
노회안에서
성소병원이사, 교회학교연합회와 평신도회연합회장, 노회회계를
거쳐 1984년 제115, 116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은퇴장로회
부회장이다.
사회적으로는
YMCA와 와이즈멘 부회장 기드온안동캠프회장, 안동시군약사회장,
경북약사회부회장, 경북약사회부회장, 대한약사회와 서울대약대
동문회이사, 안동교육위원회 부회장, 로타리안동클럽회장,
영문고등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도 대구영남고교,
안동재활원 이사로 재직중이다.
해방전
인천에서 위생재료 군수공장 일을 본 것과 해방후 안동도립병원
약제과장, 6·25전 3년간 안동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한 것도
뺄 수 없는 경력이며 개인적으로는 6·25이후 40여년 간
안동시내에서 경안약국을 경영했었다.

1.우열성(Stanton K.Wilson)선교사
1980년
7월 10일 임원회(회장 강경봉 서기 조석규)는 7월 21일
11시 안동교회세서 우열성 선교사 전별식을 갖기로 하고
참석범위는 노회 임원과 증경노회장, 노회산하 각 기관장으로
하여 전별식에서 감사패를 드렸다.
우열성
선료사는 1954년 안동선교부에 와서 경안고등성경학교 이사와
교수, 학교법인 경안학원 설립이사와 경안고등 제2대 교장을
역임하고 부인과 함께 모자원 이사를 역임하며 일하다가
미국연합장로회 한국선교부 총무가 되어 일하다가 정년을
맞아 귀국케 된 것이다.
2. 안두화(Edward Edams)
1980년
10월 25일 임원회(회장 강경봉 서기 조석규)는 탑리제일교회
안두화선교사기념관 봉헌식에서 안두화 목사에게는 감사패를
드리고 대지를 찾는데 많은 공헌을 한 조규화 목사에게는
공로패를 수여키로 결의했고 후일 식전에서는 강성대 장로에게도
장로에게도 공로패를 수여했다.
안두화
선교사는 안의화(J.E.Adams) 선교사의 장남으로 1921년
한국에 와서 황해도 재령에서 활동하다가 25년 대구 선교부로
와서 1950년을 전후해서 경산, 의성, 군위, 영천 등지를
순회 전도하며 많은 토지를 사서 100평씩 10년 상환조건으로
농민들에게 나눠주어 농민의 자립을 도왔고 계명대학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1961s년 6월 정년퇴임 했는데 6·25때에
피난민을 제주도로 피난시키는데 공이 커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고 1963년 7월 귀국했는데 탑리제일교회는
상환받지 못한 주변의 땅을 찾아 안두화 선교기념관을 건립했던
것이다.
3. 마삼락(Samuel H. Moffett)
1981년
7월 20일 임원회(회장 권오현, 서기 조석규)는 귀국하는
마삼락 선교사는 초창기 한국장로회 선교사로 공이 많은
마삼열(S.A.Moffett) 선교사의 3남으로 처음엔 중국선교사로
갔으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귀국한
후 1955년 11월 한국에 부임해서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
플라우어(Eileen Flower)와 안동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경안노회소속 농촌교회를 돌보다가 경안고등성경학교장과
경안학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1959년 장신대 교수로 부임해서
은퇴하기까지 봉사했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프린스톤신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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