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파의 분열은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로 오염된 교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에서 일어났고, 기장파(基長派)의 분열은 서울을 중심하여 학문의 자유와 교회의 현대화 또는 세계화의 기치 아래 일어났다.

   고려측의 지도인물은 출옥성도 한상동(韓尙東) 목사였다.  그는 같은 출옥 성도인 주남선 목사와 협력하여 신사참배로 오염된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다가, 보다 확고한 정통주의(正統主義)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박윤선(朴允善) 목사와 논의한 끝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당시 만주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부임이 늦어지자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고려 신학교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려신학교측의 독선적 태도에 교회들은 경원과 경계심을 일으키게 되어 1946년 12월에는 벌써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인가 취소 문제가 대두되었다가 1948년 9월에 이르러 이를 결정하고, 1949년 4월의 제 35회 총회도 고려 신학교와 관계가 없음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1951년 5월 24일 총회와 1952년 4월 29일 총회에서 재확인 되었다.

   그 후 1959년 예장교회가 소위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분열된 후에 고려측은 합동함으로 합동파(合同派)라는 공인된 칭호를 조성하여 약 2년을 경과한 후에 다시 고려파로 환원하였다.

   경안노회는 고려파 분열에 따른 노회의 분열은 없었고 몇 교회와 소수의 교인들이 이탈하여 고려파로 분리하여 나갔다.  고신파 출신이 인도하던 운산교회와 서편시찰내 대국교회는 고려파로 분리되어 갔고, 남편시찰 덕봉교회는 10여 명, 승동교회는 청년 수명 이외에는 전교인, 다른 교회도 많은 교인이 이탈, 중앙시찰도 고려파 문제로 어지러웠다고 노회에 보고하고 있다.

   제 54회 경안노회(53.11.24 ∼ 27, 안동 서부교회)에서는 가구교회 당회장 하종택 목사가 노회 탈퇴 성명을 내고 고려파로 이탈한 데 대하여 목사 제명 처분을 내렸으며 이 일로 가구교회는 어려움을 당했다.

   안동교회는 고려파로 분리한 5명의 명부를 삭제하는 결의를 하고 이후 고려파에 참관하는 교직자는 치리하기로 결의한 바가 있으나 더 이상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고려파와는 반대 방향의 파동이 기장파의 분열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신학의 운동으로 그 출발은 일제 말엽, 서울에 조선 신학교(한국 신학대학의 전신)가 설립되고 해방후 38선으로 인해 평양신학교가 격리되자 1946년 6월 12일 모인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 신학교로 인정한 데 있었다.

  그때 조선신학교의 주도 교수는 김재준 목사로 그는 현대신학 노선을 과감히 따르고 가르침으로 점차 교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1947년 봄, 조선신학생 51명이 제 33회 총회에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을 고발함으로 분열은 표면화 되었다.  총회가 선택한 조사 위원회는 김 교수를 단죄하는 방향으로 갔고, 김교수는 거기에 반항하여 조화의 길을 찾지 못하였다.

  1948년 5월에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장로회 신학교가 별도로 설립되고 1951년 5월에 부산에서 모인 제 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의 인준을 모두 취소하고, 총회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했으며, 그것은 실질적으로 장로회 신하굑의 개편이었던 것이다.

  1953년 4월 24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3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측은 총회 탈퇴를 선언하고 1953년 6월 10일, 한국 신학대학 강당에서 분립된 9개 노회(전북, 군산, 김제, 충남, 경서, 경북, 목포, 충북, 제주) 대표 47명이 모여 호헌 총회의 이름 아래 새 총회를 조직함으로 분열이 확정된 것이었다.

  위와 같이 고려측과 기장측은 모두 신학교가 먼저 설립됨으로 교파가 분열되는 경우였다.  그것은 장료교 신학에서 좌우양극이라고도 하겠다.

  본 경안노회는 기장파의 분열에 따른 노회의 분열은 없었고, 그 피해도 북편시찰을 제외하고는 극히 적었음을 볼 수 있다.

  제 55회 경안노회 추천서를 써주고도 뉘우치지 않는 영주 중앙교회 안언약 목사와 풍기 북문교회 이성조 목사를 제명처분 한 연고로 교인들이 이탈, 극히 소란하였으나 제56회 경안노회(54.11.30 ∼ 12.4. 안동 동부교회)에 「양교회는 믿음에 굳게 서서 이겨나가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1954년, 영주 중앙교회 당회장인 안언약 목사가 기독교 장로회에 속할 것을 표방하므로 극심한 교파 싸움이 있었고, 구속, 유열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분쟁의 와중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신도들이 따로 나와 1954년 10월 첫째 주일 유효종 장로댁에서 예배드리니 장로 4명, 집사 13명, 장년이 30명이었다고 한다.  다음해에 박중철 목사를 초대 목사로 청빙하고 교회가 부흥하던 중 1956년 5월 9일 제59회 경안노회에서 영주 동산교회로 명의 변경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고려측과 기장측으로 좌우 양극이 이탈한 후 남은 다수는 1959년에 최대의 분열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곧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이었다.

  이번 분열의 표면적 이유는 세계 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 WCC)에 대한 찬반에서였다.  즉 이 세계적 기구를 신신학, 용공 및 단일교회 지향의 맘모스 단체로 보고 거기에서 탈퇴를 주장하는 측과 그곳에 계속 머물면서 시시비비하며 세계교회와 협조하자는 측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그거은 표면적 이유였고, 이면에는 복잡한 이해 문제가 엉켜 있었다.

  가령 총회 신학교장 박형룡 박사의 행정적 과실에 대한 찬반, 총회 총무의 위치에 대한 경쟁 등등이었다.  이래서 1959년 9월 28일, 대전 중앙 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는 먼저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로 시비가 시작되었다가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비상 정회를 선포하자, 여기에 대항하여 총회장의 불신임안이 제기되어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회장을 불신임한 편은 곧 대전에서 서울로 이동하여 9월 30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성급하게 총회를 속개하여 연동파(蓮洞派)라 불리고, 다른 편은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였으므로 승동파(勝洞派)로 불렀다.

  그 후 연동파는 1960년 2월 17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중립파와 승동파 일부를 포섭하여 통합 총회로 모였으므로 통합파(統合派)가 되었고, 승동파는 고려측과 합동함으로 합동파(合同派)란 이름을 얻게 되고, 약 2년후 고려파 주류는 다시 이탈해 갔으나 합동파의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한국 최대교파의 분열이며, 또 거의 비등한 수로 분열되었으므로 그 피해도 가장 컸다.

  본 경안노회는 많은 이탈자들이 생겨나기는 하였지만 한국 최대의 교파 분열인 점에 비추어서는 피해가 최소화되었고, 특히 노회가 분열되지 않은 거은 본 경안노회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인즉 경안노회에는 건실한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광현 목사께서 총회 서기겸 총무로 평화 위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고, 안동 선교부의 분명한 지도 노선과 노회적으로 평화위원 및 수습 특별 전권 위원회 활동이 주효했던 것으로 본다.

 반면에 당시 의성군 전역과 청송군 일부가 속해있던 경중노회는 심한 싸움으로 대다수 교회가 합동측으로 넘어가 노회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제66회 경안노회(1959.11.24 ∼ 27, 안동 동부교회)에서는 분열된 양 총회에 대한 총회 총대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동의(총대 보고는 받기로)와 개의(총대 보고는 경과보고로 듣고 양 총회는 부인하고 주립을 지킬 것)의 표결을 다음 노회시까지 보류하고 평화 위원으로 김진호, 이성찬, 최영두, 오승련, 민병훈 제씨를 선정하여 총회 평화를 도모케 하기로 하였고, 선교부의 제안서는 지키기로 가결하였다.

  여기 선교부의 제안서는 안동 선교부 선교사들이 각 교회에 권고 성명서를 발송한 것으로 「교회 연합 운동(Ecumenical Movement」은 신신학이 아니다.

  경안노회의 총회 총대는 전원이 연동쪽을 지지한다.  중립은 장단이 있어 자칫하면 노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기 쉽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