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이후 1920년대 한국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수적 증가와 발전이 193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사회와 경제적 사정은 악화되어가고 있으나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보아 성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교회수 |
목사 |
선교사 |
장로 |
영수 |
유세 |
세례 |
교인수 |
1923년 |
122 |
7 |
1 |
46 |
|
|
1389 |
3960 |
1925년 |
133 |
9 |
1 |
62 |
|
|
1960 |
5317 |
1929년 |
124 |
11 |
4 |
58 |
143 |
791 |
1810 |
5420 |
1931년 |
133 |
12 |
2 |
89 |
136 |
1072 |
3083 |
7112 |
1933년 |
145 |
11 |
3 |
104 |
174 |
1493 |
1493 |
10343 |
이러한 추세는 노회각 시찰별로
부정기적이나 한해 평균500명 이 상 새로운 신자가 등록되고
원거리에 떨어진 곳은 몇 명이 모여 기도소로 출발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특별히 이러한 교회
발전에 두 개의 축이 있다면 전도와 교육이었다.
각 교회는 성경 공부 중심 사경회를
열었고, 이 형편이 곤란하면 지역별 연합으로 사경회를
개최 하여 전도의 길을 열었다. 부인전도회는 1929년 이후
지방회도 68처(1930년)나 조직하여 여성전도에 한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육면에서는 주일학교지도자 교육은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특별기간을 정하여 강습회를 개최하여 배출하다가
단기 성경학교를 통하거나 노회가 매년지도자 강습회를
열어 교사들을 육성시켰다. 교회가
설립되면 어디서나 주일학교를 설립운영하였고 장년과 아동으로
분리하여다양한 교육 과목을 제시했다. 14회 노회(1928년)
주일 학교 상황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일학교수: 104처 2) 학생수
: 6,030명, 장년 : 3,729명, 유년 : 2,301명 3)
직원수 : 808명 4) 총합 ;
6,838명 5) 공과 : 표준공과
6) 연보 : 잘 되는 곳도 있고
못되는 곳도 있음 특별히 노회
부서 중 농촌부 활동이 괄목할 만하다. 교회 생활 근거지가
농촌인 만큼 교회마다 농촌 연구회를 조직하여 농촌에 대한
서적과 잡지를 구입하고 3,4교회를 1교구로 하여 순회강연을
수시로열며 교통편의에 따라 농산종자, 비료, 농기구등을
공동구입했다. 여성에게는 물질문명에 지배 받지 않는 사업을
권장하고 여러 교양분야나 농작법을 연구하여 모범 수도
경작을 가가 교회에 시켜 다수확을 장려했다.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주일학교와 매년
하기학교를 통해 실시했으며 전도와 문맹퇴치를 위해 교회
내에 학교를 세워 공부케 하고 노회서는 학무부를 두어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운영사항을 점검했다. 그러나 당시
교회 내 학교는 지속적인 곳도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열고
폐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의 발전과 활동도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제가 군국화되어 통제와 간섭에 의해
교회는 점차 축소되고 약화되어 가게 된다.
2회에 걸쳐 시행되었던 주일학교
대회에 관해서는 시대적 상황과 맥락아래 이해가 될 필요가
있다. 3.1운동 이후 교회에서 배출한 지도자의 활동으로
사회는 자연히 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가 국제적
여론 때문에 우리에게 허용한 국제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일제 아래지만 능력만 되면 참여할 수 있는 국제 스포츠대회와
다음은 종교적으로 교회연합을 내용으로 하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나 세계 주일학교대회였다. 여기에
참여한 우리 대표는 자연히 국제 정세와 민족적 각성을
촉구받을 수 있었고, 교회는 주일학교 운동이 사회적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정당한 기반과 조직을 마련했다. 전국 주일학교대회가
열리게 된 것은 1921년 8차 세계 대회가 일본 도쿄에서
열려 세계 각국 대표지도자 300여 명이 내한하게 됨에 따라
환영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즉 이것이
1차 전 조선 주일학교 대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제 2차
전 조선 주일학교대회는 4년후 1925년 11월 21일부터 2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고, 서울대회 이후 평양, 대구로 전국 순회
개최되었다. 경안노회에서는
13회 노회(1927년 12월 21일)에서 본 대회 개최를 허락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시일 : 1928년 9월 19일 2.
장소 : 안동읍 법상동 예배당 3.
회비 : 매인 50전씩9한교회 10인 이상 40전, 50인 이상
30전)주일학교 대회를 하기 위하여
본 노회에서 120원 보조하여 달라는 청원은 재정부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이렇게 준비하여
이듬해 열림 제 1회 경안노회 주일학교 대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되었다. 1.
시일: 1928.9.19-26 2.
장소 : 안동읍 법상동 예배당 3.
강사 : 정인과 목사, 흥병선 목사, 김관식 목사, 권찬영
목사 4. 경비 : 수익급
6백 9십 7원 38전 지출금
6백 9십 2원 50전 차인잔고
4원88전 간략한 보고이나 당시 강사진을
보면 안창호 제자로 정인과 목사와 농촌운동가며 YMCA운동을
일으킨 감리교 홍병선 목사,김관식 목사는 사회운동에 널리
앞장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회가 일ㅉ기안동에서
개최 할 수 있었던 것은 노회 주일학교 경상협회장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전국 주일학교 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한 강병주 목사가 본 대회는 계획추진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미비한 시설 속에서
많은 인원을 숭용하기에는 고충이 많았었다. 안동 법상동
예배당이 지금 유치원 함석 지붕 목조 건물로 교회 내에서
집회를 열기 어려워 남편 벽을 헐고, 외부에서도 강단을
보일 수 있도록 하고 교회 정원에는 대나무로 골격을 높이
세원 다음 광목으로 덮어 간이 천막을 쳐서 집회 장을 만들었다.
마이크 시설도 없고 산만한 분위기나 집회열기는 대단하였다.
제 2회 경안노회 주일학교 대회는
22회 노회(1932년 12월 20일)에서 허락 개최 하기로 하고
대회조직과 예산을 편성했다. 대회를 잘 추진하기 위해
한시적 유급 총무를 두고 대회담당으로 각부를 조직, 책
1천권을 발간 하기로했다. 2회 대회는 다음과 같이 실시되었다.
1. 시일 : 1933년
4월 26일~5월 3일까지 2.
장소 : 안동읍 법상동 예배당 구내 천막 3.
선상 : 정인식, 김관식, 안대선, 강병주, 황상호,김성규,
옥호열, 권찬영 4.
과목 : 유치부연구, 소년부연구, 청년부연구, 장년부연구,
한글 주일원리연구, 찬송
청년기도회, 강연회, 음악회, 활동사진, 세계주일학교대회보고,
세계면려대회보고,
세계국제선교연맹 보고 등 5.
회원 : 주간 2,300명 야간 5,000명 6.
경비 : 수입 766원 40전 지출
:748원 88전 잔액
: 17원 57전 7. 겸하여
총무 강병주 목사 10주년기념식을 거행하였음.
이상 보고서로로 당시 어려운 형편상
얼마나 성대한 집회였으며, 불편한 여건과 상황에서 민족교육이
기독교를 통해 호응이 컸음을 회원 동원력에서 보여주고
잇다. 제 3회 주일학교대회는
계획하여서 추진하여 오다가 1937년 9월 2일 임시노회에서
내외적 사정에 의하여 무기 연기되므로 열리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4년마다 열기로 한 주일학교 대회가 비록 여건상 2회개최로
끝났으나 이를 통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과 교육을 통한전도나 조직 동원력을 보여줌으로 그
의지가 크다고 하겠다. 26회
노회(1974년) 의 주요건은 무엇보다 1885년 한국에 선교사업이래
선교 50준녀 희년기념 행사fmf 개최하는 일이었다. 행사준비
위원으로는 권찬영, 이원영, 임학수, 김진호 목사로 선교
반세기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반성 및 다짐을 갖는 귀중한
행사였다. 당시 행사 대표 위원 김진호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선교 50주년을 "희년 기념식"이라 칭하고 1934년
12월 17일 오후 4시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안동교회에서
모인본 노회원과 도사경회 회원. 안동
3교회(법상,안기, 신세)교인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들 천여명이
동원되고 미리 제작한 크고 작은 축하기를 모인 자들에게
배부했다. 모든 사람들이 기를 들고 양화석 목사의 지휘로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지를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엇다. 오후 4시 30분 다시 처음 장소에 모여 찬송을
하고, 경안노회 만세를 3차 인도자에 따라 호찬한 뒤 기념식을
마치게 되었다. 이어 저녁 7시에 안동교회에서 희년 축하예배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노회장
이원영 목사가 희년 찬송을 인도 합창하고 임학수 목사의
기도, 장사성 목사 성경 이사야 6장 13절 봉독, 회장이
26회 노회가 개최됨을 광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안동교회
악대의 주악과 찬양이 있었고 권찬영 목사의 희년에 대한
오묘한 이치를 해석하는 설교 후 노회 안에 교역 20주년된
교역자와 신주 30주년된 신도에게 표창식이 있었다.
▶교역 20주년 : 김영옥, 권찬영,
김인옥, 강석진, 장사성, 김우일, 권수백, 김종수, 강우근,
권중한,
김익현, 김정숙 ▶신주 30주년 : 권찬영 ,
권애라, 김인숙, 김영숙, 권수백, 김병우, 윤주석, 박치동,
김익현, 서화선,
김성삼, 마호영, 김동규, 김변식, 김재성, 권정낙, 정봉모,
김선실, 김금이,
김정희
다음으로 교회약사 서화선, 기념사
김영옥,장로대표 김익현,전도사대표 황여규의 축사가 있은
후 1장 찬송을 회장이 인도 합창하고 강성직 목사의 축도로
희년기념 축하 예배를 마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수양회
강사로는 축사내빈이 었던 주기철 목사가 열열한 말씀선포가
있어 많은 은혜와감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행사는
축하기념으로 끝나지 않고 선교정신을 살려"희년전도운동"이라
명명하고 전도부에 맡겨 지속적 활동을 하기로 했다.
권찬영<Y. John Crothers)선교사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방되었던 해 몇 개월 전 미북장로회
해외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1910년 1월 경안 지역 선교사로
부임했다. 프린스톤 신학을 졸업, 보수신앙으 ㄹ가졌으며,
1907년 경안지방 최초의 산교사 쏘텔(C.C.Sawtell)목사가
활동하다가 병사하게되자 그의 후임으로 파견을 받았다.
1911년 쏘텔 부인의 여동생 권애라(Ella Mc Clung)와 결혼,
시대와 지역상 어려운 경상도 북부지방을 떠나지 않고 왕성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25회 노회(1934년 6월 5일)에서는
안동 법상동 교회에서 권찬영 선교사 동부인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회장 이원영
목사 사회로 찬송, 기도 성경봉독후 선교 취지와 서화선
목사의 양력소개, 임학수 목사의 축사, 기념품 증정이 있었고,
노회 대표 김진호 목사, 교회와 개인 대표로 장사성 목사가
진정하고, 김세명 장로 축하문 낭독, 김인옥 목사의 축도로
성대한 축하식을 가졌다. 그
후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안동 선교부는
페쇄하지 않고 계속 유지 했으며 해방이후 은퇴한1952년까지
40여년을 안동에서 주재하여 선교활동을 함으로 "Mr
안동"이라 불릴정도로 안동을 사랑했고 지역 사람들로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1939년 3월 30일 안동 법상동 예배당에서
임시 노회가 다급하게 열렸다. 당시 33회 노회장으로 피선된
권중한 목사가 갑자가 소천하여 모이게 되고 논의 끝에
본 노회서는 처음으로 노회장으로 권중한 목사 장례식을
정중하게 거행했다. 순서에
따라 김세영 목사 인도로 묵상, 찬송후 강신충 목사의 기도,
윤주한 목사의 성경봉독, 시회자의 취지설명, 영양읍 교회
김태진 장로의 약력소개 임학수 목사가 고별사, 황병혁
장로의 조사, 유족 위로의 기도와 강병철 목사의 말씀이
있었고, 찬송후 김세영 목사의 축도로 교회와 노회를 위해
힘쓴 권중한 목사의 노회장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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