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후반부터 일본 정권이 파쇼정치로 치달음에 따라 국수주의의 조작된 상징은 천황을 정점으로 군국화되었다. 이 군국화는 정치에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에 이르기까지 재편성되어 민족운동을 억압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민족운동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교회에 대한 정신적 근 절책을 수립하였다.

  1939년 3월에 조선 총독부는 교회에 대한 시정 방침을 결정하고 기독교를 없애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지난해(1937) 7월 지나사변(支那事변)일 발발하여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은 제국의 병참기지로서 출정 장병의 수송, 군수 물자의 공급 등 중대한 국가적 역할을 맡아 그 동안 출정 황군의 환송 국방헌금, 황 군의 무운장구 기원 및 전모로 위령제 등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비상 시국의 타개에 매진하려는 기운이 횡일하여 미증유의 국민적 긴장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9만에 달하는 예수교 신도들은 시국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견지하고 신사에 있어서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기독교 계명에 위반된다고 하여 참여치 않으며 때로는 만왕의 왕이라고 설명하여 불경죄로 문의 처단되는 사례 등 또는 잘못된 평화 관을 가지고 반전적 언사를 농하는 경우 등의 사건이 수소에 발생하여 총 후 국민정신의 결속을 문란케 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지도를 등한히 하게 되면 그것은 모름지기 기 시국 하 국민의 정신적 총동원을 저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국을 인식하고 각종 국가적 행사에 협력하고 있는 민중과의 사이에 더욱더 마찰 상극을 조성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본 년 3월 이의 지도 대책으로서..."

 이러한 시정방침으로 지도대책이란 다음 6가지 항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1.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예수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해서 지도계몽에 노력하고
      이를 통해서 일반교도의 계몽에 대처할 것.
  2. 시국 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한 지도 및 시설
     1) 교회당에는 될 수 있는 한 국기 게양탑을 세울 것. 세우지 않은 경우라도 축제일 또는 다른
         경사 날에는 반드시 국기를 게양할 것.
     2) 예수교도의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실시함과
        동시에 전승축하회에는 일반 민중과같이 이적극적인 참가를 조용할 것
     3) 학교 생도의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나 일반 예수교도의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지방의 실정을 참작하여 먼저 교도의 신사에 대한 관념을  시정 이해하도록 하여
        강제하지 않고 실효를 두는 방법으로 지도할 것.
     4) 서력연호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하여는 이상 각항의 실시는 선교사의 자각에 맡길 것.
  4. 찬미가 기도문 설교 중에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해서는 출판물의 검열 및 인감 등에
      의해서 엄중 취재할 것
  5. 당국의 지도를 실시할 때에 이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교도로서 부득이 한 경우에는
      관계법령(행정 집행령, 경찰법, 처벌규칙 기타)를 활용해서 합법적으로 조처할 것.
  6. 국체에 적합한 예수교의 신 건설 운동에 관하여는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해 보아 목적이
     순진하고  장래의 성과가 예견되는 것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원조해  줄 것.

  이상에서 보면 총독부의 기독교 지도대책이란 바로 기독교 근절 책을 의미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려는 저의로 해방이 될 때가지 한국 교회들의 수난이 시작된 셈이다.


   이러한 참배 형식의 강요로 교회가 시련을 받기 시작하나 것은 합병직후 일본 천황의 사전에 축절(祝節)때마다 최경례하라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1921년 전국의 선교사들은 진정서를 내서 신적지고성(神的至高性)을 부여하는 천황에 대한 "예배"를 "기독교에서 있어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해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15일 남산 중턱에 소위 사격(社格) 관폐대사(官幣大社)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준공되고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이 제신(祭神)으로 소위 진좌(鎭座)되고 나서는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경신(敬神)의 도(道)와 조선숭배(朝先崇배)를 가지고 국민정신의 근간(根幹)으로 하는 일제 정체(政體)에의 충성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 와서는 서서히 격화되어 본격적인 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한 때부터이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매큔(G.S.McCune, 윤산온) 박사와 숭의여고 교장(V.L.Snook)여사는 우선 학교의 대표자로서 참배할 것을 요청받았고, 끝내는 폐교위협과 면직 사태까지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교회 사정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정식으로 요구하고 나섰을 때 천주교와 감리교는 이를 종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 46만 교인 중 6할을 차지하는 27만 3천의 장로교도는 이에 불응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비상대책을 세웠다.

   우선 각 지구 경찰서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 및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응하도록 개별 또는 단체로 접촉하고 1938년 9월에 열릴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때 장로교 대표들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막후 공작을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였다. 그리하여 1938년 8월 31일까지 전국 23노회 중 순천노회가 그 첫 희생이 되어 17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하고 개회 벽두에 신사에 몰려가 참배를 솔선수범하도록 강압을 가했다. 그러나 경남 노회와 같이 신사참배 반대 결의의안이 통과되었고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 노회에서는 1938년 8월 30일 안동 성경학원에서 임시 노회(회장 김진호 목사  서기 양회석 목사)가 회집되어 시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며,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결의 통과되었다. 따라서 노회는 각 교회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따라서 노회는 각 교회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교회 스스로가 추방해야 하는 수난과 시련이 시작되었다. 노희의 이러한 억압적 결정은 1938년 9월9일 평양에서 모인 27회 총회에서 더 조직이고 억압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제 경찰은 노회별로 총회에 참석할 총대 중 반대할 기미가 잇는 사람은 아에 대의원이 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선출된 대의원들에게는 전담형사를 배치하여 세뇌공작과 위협을 가했다.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193명 사이사이에 경찰 97명이 끼어 앉아 회의 진행을 감시했다.

   첫날에는 임원 선거가 있었다. 총회장에 흥택기, 부회장에 기길창, 서기에 관진근, 회계에 고한규였다. 둘쨋 날 오전 10시에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소위 삼노회를 대표해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했다.

   블레어의 반대발언은 즉각 거친 경찰의 폭력 제재를 받아 퇴장되었고, 홍택기 회장의 의식적인 가결회 책으로 서둘러"가(可)하면 예 하시요." 한 다음 몇 사람의 "예"라는 대답에 회장은 부(否)는 묻지도 않고 곧장 "가결이요"선언하고 말았다.이와 같이 신사참배는 불법적이고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통과된 성명서를 권태희 서기가 낭독을 했다.

   "아 등(我等)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하고 추이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써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함"

   서기의 낭독이 끝나자 평양노회 목사 심익현은 위의 결의를 즉시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총회역원 및 노회장은 장로회를 대표해서 평양 신사에 참배하도록 동의하여 즉시 통과되었다. 총회 폐회부 부회장이 임원을 대표하고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해서 곧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일제는 이선 총회의 결의문  이후 "소화 10년(1935)이래 세인의 주목을 끌어왔던 야소교도의 신사참배 문제는 완전히 해결을 고했고 조선 기독교는 소위 일본적 종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종교 단체법은 한국 기독교를 파괴하며 수백명의 순교자를 내게 한 무서운 흉기로써 악용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는 폐쇄되고, 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9여 명의 교역자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 경안노회에서 당한 일제의 박해와 저항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1938년 미나미총독은 일본의 "대정익찬회"운동에 호응하여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일제에 대한 멸사봉공(滅死奉公)을 강요하는 단체로 전시에 있어서 국방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대동아 질서확립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단체였다.

    이 단체의 총재는 조선 감독이 되고 부 총재에는 정부총감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부락과 직장마다 조직함으로 민족의 정신과 재산을 모두 사탈 할 생각이었다. 당시 한국인치고 유명 인사는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거의 이 연맹에 관계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9년 9월 11일 신의주에서 제 28회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일제가 바라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향함은 황국 부동의 국시이다. 아등(我等)은이에 더욱더 단결을 공고히 하며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해서 국책 수행에 협력하고 또 복음 선전사업을 통해서 장기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

   이 결의문은 일제가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에 참가하여 일제에 충성스런 역군이 되겠다는 서약서와 같은 것이었다.  이 조직기구는 명령식으로 상부에서 하부 조직으로 결성, 이사장 자리에는 총회장이 이사는 각 노회장이 되며, 노회는 그 지맹이 되어 노회장이 지맹장으로 노회총대가 지맹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맹이 결성되면 각 교회에서도 동일한 기구가 조직되도록 했다. 여기에도 규약순서. 선언문이 미리 인쇄되고 각 교회 당회장 앞으로 송달되었다. 이 규약명칭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안노회OO 교회 애국반 규약" 으로 애국반 반장은 당회장이 반원은 당회원으로 평의원은 교회 내 제직 중에서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 노회에서도 이와 같은 조직을 결성토록 중앙에서 회의순서 규약 및 선언문이 내려왔기 때문에 영주읍 예배당에서 모인 34회 노회(1939.12.12.)는 시키는 대로 순응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경안노회 연맹 결성식 순서

  사   회 : 김은석
  궁성요배
  국가봉창............일동
  황국신민서사재송.........일동
  찬송가......32장....일동
  기   도....강성진
  성경봉독......김진호
  취   지......김은석
  규   약.....강병주
  선   언......일동
  내빈축사.....경상북도 경찰부장, 이정식, 영주군수
  축   도........황군장병을 위함과 동양 평화를 위하여

  당시 노회장 김은석 목사의 경건회 설교 제목을 보면 "나를 따르라"9막 1:17-18) " 무거운 짐진자 오라"(마11:28-30)"예수의 무저항주의"(마5:38-42)로 내면적 어려움을 추측케 한다.

  총동원 결의건에 대한 사무처리는 조선 4대 절기에 축하식 순서를 등사하여 각 교회에 발송하였고 노회 조직측에 국민정신 총동원 포교계를 두어 김은석 씨로 결정되었다.

  다음해 1940년 12월 17일 영주 예배당에서 모인 35회 노회록에 의하면 노회원 참석자 명단에는 거의 모두가 창씨개명으로 등재되어 있고, 19일 오후 2시엔느 노회 회집기간중 총회에서 "국민정신"대신 "국민총력"으로 일부명칭을 개칭"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연맹결성식"을 가져 조직을 재 정비하기로 하였다. 동기간 20일에는 국방헌금 30원을 거두어 들였다. 이러한 허황된 총회와 노회의 결성과 결정이면에 농촌교회의 실상은 말이 아니었고, 문을 닫아야 하는 교회가 증설되었다.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고 인적 물적 조달이 어렵게 되자 교회에 대한 수탈 내용도 여러 가지로 강요되었다. 그 하나가 한국인에게도 군대 징집력잉 내려지고, 이들을 죽음의 전장에 내보내면서 교회가 축하회를 가지는 일이다.

   징병제 축하회는 제 37회 노회(1942년 6월 20일) 가 영주읍 예배당에서 회집될 때 저녁 집회시 실시되었다. 그 식순을 보면 당시 정황이 어떠함을 짐작케 한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일동경레
  * 궁성요배
  * 묵   도
  * 국가합창
  * 개식사
  * 축사(김광우현 목사, 기독교 조선연합회 간사, 택전 고등주임)
  * 우미유가바(일제 군가 일종)
  * 황국신민서사제송
  * 폐   식

   본 집회 기간동안 보고건에 따르면 애국심 고취를 위한 시국강연을 열었다는 것과 지난해 9월 7일 본 노회 구역내 각 교회에 국민총력 연맹 사무건으로 공문을 보내 유기헌납 주일을 정하게 헌납품이 55처에서 899점에 달하였고, 10월 5일은 총력여자연맹결성식을 시행하였으며, 11월 6일 주일은 애국기 헌납주일로 정하여 105처교회에서 일금 3,418원 65전이나 각출해 내었다. 그리고 당년 1월 8일에 각교호에 공문을 발송하여 전승기도회를 결행토록 하고, 38회(1942년 12월 15일)노회가 열리는 안도읍 예배당에서는 일제의 광적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국가비상 시국을 극복하기 위한 애국봉사로 규정하여"군대 징집 의무 교육제 및 성전 승리 위원회'를 거해하였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주   악
   * 경   례
   * 궁성요배
   * 국가봉창
   * 개식사
   * 찬송가 합창 제 8장
   * 기도(평전 풍수목사)
   * 성서낭독(롬 12:1-7, 안동의 봉 목사)
   * 찬양 법상 찬양대
   * 강설 안동의봉 목사
   * 천황폐하 만세 삼창
   * 폐식사

   지금까지 교회는 마치 미치광이싸움을 꼭두각시처럼 그것을 성원하는 어리석은 행적을 점철하여 남겨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도 마음에 충족되지 않아 38회 노회 회집(1924년 12월15일)을 마지막으로 일제의 강압적 교단 편입 조정으로 본 노회는 경북 교구단에 소속되고 거의 3년동안 노회가 열리지 못하는 형극과 암흑의 절정기를 당하게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교회에 대한 탄압은 1941년 이후 노회로 하여금 각처에 개척되 ㄴ교회를 통합 흡수하도록 하여 전도의 길을 차단시켰다. 36회 임시노회(1941년 11월 6일)는 행정구역에 따라 일개면에 일교회로만 한정해 허용하고 나머지 예배당은 매각토록 종용하고노회서는 그 매각금을 국방헌급하도록 했다.

   노회 매각위원은 임학수, 삼전 종원 양씨로 정했다. 따라서 그 교회당은 최저 가격으로 피와땀으로 세운 교회를 매각키로 했다. 당시 나타난 국방헌금 배정 현황은 다음과 같다.

   중앙 1,000원   성내 2,000원   대룡상 10원
   두전  10원      용상    50원     막현  50원
   가운   30원      오은 150원      박산 20원
   신암    30원                         합계 3,360원

    비안면 화신교회는 쌍계 교회로 합동하고 예배당을 200원에 매각하여 50원은 국방헌금 하고 50원은 본교회의 부채금을 상환,잔금은 본교회 수리비로 사용되었다.

   안동에서는 1942년 3월 15일에 동부교회와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 통폐합되었다. 양교회의 대지와 건축 대금으로 14,000원을 받아 9,000원은 국방헌금으로 기부하고, 3,000원은 안동여자고등학교에 사용 그 나머지 2,000원만 본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영주에서도 1942년 2월 6일 같은 절차를 밟아 영주 제일 교회로 합동되고 국방헌금을 했고 경안노회 모교회였던 비봉교회는 교회당을 뜯어 일본 소학교에 사용하려는데 모교회였던 비봉교회는 교회당을 뜯어 일본 소학교에 사용하려는데 항의한 박봉순, 설봉화 장로와 설인철, 구경모 집사가 경찰에 끌려가 문초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경안노회 교회 모두가 이러한 처지에 놓여 합동 폐지되어 매각된 교회는 일제의 전쟁 비용으로 강제 수탈당하고 교회가 없으므로 교인은 자연 감소되는 암흑기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이 광란에 이를 때 하나님의 심판은 어김없이 내리고 해방의 새벽은 오고야 말았다.


     1. 이원영 목사

   한국 기독교 역사에 교회의 부흥발전과 정치적 업적에 기여한 인물이 많았다. 그 중에 가장 전형적 한국인 기풍과 가슴에 닿도록 일관지한 신앙인의 인물을꼽으라면 이원영 목사이다.

   유교적 유풍이 잔존하는 안동군 도산면 출신인 이원영 목사는 대유 이퇴계 후손으로 유교적 교육과 품격으로 성장했고 1919년 3.1독립만세 사건 때 예안 장터에서 2차에 걸쳐 거사를 이끌다가 피검되어 1년간 서울 서태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안동에서 만세사건으로 피검 중이던 이상동 자로의 전로를 받은 것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출옥 후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 서부9아기)교회와 동부(신세)교회등지로 목회를 했다. 그러나 그는1938년 총회 결의로 신사참배를 해야 할 때 신앙적 입장에서 분명히 반대를 표명했다.

   그 후 일제 당국에 의해 목사시무를 사면(1938년 33회 노회)해야 했고 1939년5월31일, 2차 1940년 8월 29일~12월31일, 3차 1941년 7월1일~1942년 3월 21일, 4차 1945년 5월 22일~8월 16일)에 걸쳐 수감됨으로 5여년 간을 신앙적 절개를 위해 투옥되어야 했다.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로 50여 명 순교자를 낸 한국교회에서 그는 산순교자로 신앙의 표상을 의연하게 보여주었다.

   1946년 경안 고등성경학원으로 개칭된 모교에 초대원장으로 부임 교육자로 일면을 나타내었고, 노회장으로 5차 역임 안동에서 열린 총회(1954년)에서 39대 총 회장으로 피 선되었다. 이때 29회 총회시 결의된 신사참배 결의문 취소안이 의결되었고 신사참배에 대한 통회 시간을 가졌다. 그 간 후배를 위한 옥고 경험을 한마디 요청 받았을 때 "그때 잘한 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다만 마땅히 해야 할 주의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뿐입니다."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혹이 이원영 목사가 교계 공적을 찾기 어렵다고 할지 모르지만 일제의 어려운때 교회 지도자의 다수가 묵종자가 되거나 민족사회운동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사들까지도 전향된 채 그 운동과 함께 사라졌으나 충성스러운 파수군의 피의 희생은 뒷날 교회의 생명력을 재생 연결 시켜준 생명의 씨앗이 되었고, 어떤 정권과 교권 앞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을 제시해 준 점은 어떤 업적보다도 위대하다고 본다.

   2. 김충한 목사

   의서군 비봉교회 출신인 김충한 목사는 어두만(W.C.Erdman)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중과 가정에서 쫓겨난 그는 1906년에 새로 건축한 비봉교회 초대 조사로 있다가 후에 장로로 장립까지 했었다. 그는 다시 신학을 지망하여 재학중 김천에서 삼일 독립만세를 이끌다가 피검, 2년 간 수감되었으며, 출옥후 계속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비봉교회에서 첫 목회를 했다.

   그의 애국적 활동과 전도활동은 의성의 뜻있는 젊은 청년들을 교회로 오게 했고 밤에는 야학과 국민 계몽운동을 펼쳤다. 일제 말엽 요구되는 신사참배에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고 이 일로 의성 경찰서에서 탄압과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아 영어의 몸이 되었다. 해방을 맞아 그는 자유의 몸으로 출옥하여 고향 비봉교회에 돌아왔다가 1946년 대구 제일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3. 유재기 목사와 농우회사건

   의성읍 교회가 폐쇄되기까지 일제가 종교적 탄압을 전형적으로 시행한 사건이 1938년 5월에 일어난 농우회사건이다. 이는 교회가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 아니라, 일제가 자기 각본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건이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의식을 1920ㅕㄴ 후반에 점차 눈을 뜨게 됨에 따라 총회에서는 1928년 농촌부를 신설하여 사무국을 설치하고 배민수가 총무로 임명되었다. 그해 YMCA를 비롯하여 이때 전후로 활발하게 농촌운동을 전개하여 농촌진흥을 민족문제로 연결지도하여 나가고 있었다.

   그 하나가 1928년 기독교 농촌 연구회 평양 장로회 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주의 실현을 표방한 운동이었다. 이 회원으로 조만식, 배민수, 유재기등이 참여하여 전국각지에 협동조합 신용소비조합 같은 단체를 결성하여 농촌을 계몽하고 생활증진을 하여 나가려고 했다.

   유재기 목사는 영주군 이산면 출신으로 강병주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 후 어렵게 고학하여 숭실전문과 평양신학을 졸업했다. 그는 일찍 농촌운동에 적극 선도하여1933년 2월 조선일보에 19회 걸쳐 "협동조합론"을 발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한 교회에 한 조합을 설치하자는  운동을 스스로 실천, 1934년에는 시무하던 칠곡교회에서 크게 성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목사이면서 사회운동가이던 그가 의성읍 교회에 부임할 때가 32세였다. 부임후 그는 곧 기독청년운동에 주력하여 청년들의 의식과 사기를 고취시켰으며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의성지방에서 이러한 청년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의성경찰서는 1938년 봄 농우회 사건을 조작했다. 각종 교회 장부를 압수, 유재기 목사를  비롯하여 이재인, 박대환, 이동수, 백치문, 정해동, 천성훈, 구학수, 청년수, 청년회 임원들과 정일영 목사 오진문 장로가 체포 구금되었다.

   유재기 목사는 구속기소되어 1년 징역형을 받았고 다수 교인들은 8개월간  갖은 고생을 하다가 12월 말경에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류 되었던 박학전은 고문과 충격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출옥 후 유 목사는 대구로 가서 친일로 전향했으나 의성읍 교회는 1940년 12월겨여 강제 폐쇄당하고 이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한 권중한 전도사는 고문 끝에 순교당했으며 해방이 될 때까지 정기 집회를 열지 못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4. 박충락 목사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출신인 박충락 목사는 시대적 격변기에 출생(1899년 11월 28일)하여 한학을 배우면서 가정의 애국적 분위기에서성장을 했다. 신돌석 장군이 그 부하와 본가에서 기거하면서 활동하던 것을 목격했고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 김인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경안성경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36년 봉화교회 전도사로 출발, 1936년 영주제일교회 강석진 목사를 도와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40년 9월 20일 체포 구금되었다.
   1938년 이후 신사참배문제로 일제 탄압의 서릿발이 한 창일 때 시사참배 반대와 설교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영주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박 목사 본인이 남긴 글에 의하면 그 날 영주군내 기독교 신자만 구속된 이가 24명이었다고 한다. 그 후 유치장에서 열악한 환경과 고문에도 의연하게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달리 6개월 구류된 후 다시 안동으로 이감되고 육군형법, 해군형볍을 위반한 죄로금고형 3개월을 선고받고 1941년 7월에 석방되었다.

   석방후에도 검찰청으로부터 언권봉쇄를 받았으며, 교회에 급료를 정지토록 해서 다음해 4월 만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주에서 전도활도을 계속하다가 4월 만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주에서 전도활동을 계속하다가 동만 교구회에서 조선 긷고교 전도사로 시취하고 도성 황청현 왕청가 만주국 조선 기독교 제일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다.곧 고국으로 다시 귀국하여 장신대에 입학. 경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본노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87년 4월 9일 소천하였다. 그밖에 이름없이 신앙저거 절조를 지킨 사람으로 영주의 강병철 목사 강경봉장로 안동에서 김익현 장로, 김성규장로, 여성으로 김정숙 전도사, 김병규 전도사 청년으로 전계원 영덕에 주병호 장로 같은 이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외 1945년 3월에 안동농림학교의 독립회복단 사건으로 검거된 안동교회 학새이었던 손성한은 순국되었고, 패전을 예상한 이제는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여러교파의 지도자를 살해한다는 음모를 세워 사전 체포함으로 안도에서는 김광현 목사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국의 교회가 잿더미가 되도록 버리시지는 않고, 그 어두운 혹한에서 새벽을 여심으로 참극의 막은 고요히 닫히게 되었다.